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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 VS 꾼 - 제1화 "중독" (9) |
홍성만은 다시 담배 한 가치를 뽑아 입에 물었다. 그러나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조금 전처럼 강렬한 욕구는 사라졌지만 자신도 모르게 담배를 입에 물었을 뿐이다. 습관적으로. 홍성만은 담배를 물고 꺼덕꺼덕 계단을 올라가서 현관문을 잠근 후 곧장 침실로 들어가려다가 그냥 거실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쉽게 잠을 이루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쉽게 잠들지 못하는 사람은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경마를 하는 사람이라면 팬이든 꾼이든 누구나 경마 날이면 지금 이 시간, 저마다의 아쉬움과 후회와 분노가 뒤엉킨 자괴감으로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홍성만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두 다리를 뻗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한참동안 수명이 다해 희뿌연 빛을 흘려내고 있는 천장의 갓등을 망연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머리속도 텅 비어 마치 영화를 상영하기 전의 어둠 속에 앉아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상태에서 흐릿하게 오늘의 경주 모습들이 순서에 관계없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가 사라지고 다시 펼쳐졌다가 사라지곤 했다.
홍성만은 주체할 수 없는 자괴감으로 눈을 감았다. 온 몸의 기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 순간, 갑자기 피가 거꾸로 솟구치기 시작하고 숨이 가빠지는 듯했다. 아니 멈추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한 순간 몸이 소파와 함께 푹 꺼져 내려앉는 느낌이 들더니, 저 깊은 나락으로 한없이 떨어져 내려가던 몸에서 또 하나의 자신이 떨어져 나와 허공으로 둥둥 떠오르는 착각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현기증을 느끼고 잔뜩 겁먹은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아래, 드넓은 원형 경기장의 모습이 보였다. 트랙 가운데는 물길은 보이지 않는데도 한가운데를 향해 밀려든 물줄기들이 커다랗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천길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세찬 급류의 폭포수를 쏟아 붓고 있었다. 트랙 밖에서는 트랙을 에워싸고 무수한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경마장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한 무리의 경주마들이 경주로를 행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경주마들은 마치 악대의 행진곡에 맞춰 걷듯이 보폭과 속도를 맞춰 결승선을 향해 당당하고 경쾌한 발걸음을 내뻗고 있었다. 결승선 바로 앞에는 화려하게 치장해 놓은 시상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시상대 위에는 역시 화려한 연회복 차림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좁은 공간 속에서도 서로 조금도 여유를 잃지 않은 환한 표정과 미소를 띤 채 저마다의 지휘봉으로 저마다의 흥겨움과 저마다의 박자와 저마다의 제스처를 선보이며 한 무리의 악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저마다 다른 지휘인데도 악대들의 연주는 마치 한 사람이 지휘하는 것처럼 때로는 감미롭고 때로는 장엄한 화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경주마들은 경주로의 결승선 앞에 이르자 일제히 횡으로 도열한 채 마치 영화 속의 스톱모션처럼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멈추어 섰다. 이와는 달리 트랙을 둘러싸고 있던 관중들은 성난 표정으로 금새라도 경주로 난간을 밀쳐내고 경주로 안까지 뛰어들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일제히 함성들을 질러대며 결승선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홍성만은 그들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이 처절한 허우적거림으로 경주마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손짓을 하고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소리를 질러 봐도 소리는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고 휘젓는 손짓은 영화 속의 슬로우 모션처럼 흐느적거렸고 제자리 뛰기를 하는데도 두 발바닥은 땅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결승선을 바라보고 있던 두 눈은 잔뜩 찌푸려진 미간을 사이에 두고 움푹 패여 있더니 한순간 당장이라도 뽑혀져 튀어나올 것처럼 잔뜩 충혈이 된 채 부어 올랐다.
마침내 결승선을 향해 밀려드는 군중의 거센 소용돌이가 흐느적거리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밀쳐내며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군중은 나동그라진 또 다른 자신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거칠고 억센 구둣발로 짓밟으며 오직 결승선을 향해 밀려가고 있었다. 또 다른 자신은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머리를 감싸 쥐고 온몸을 잔뜩 웅크리며 군중의 발길질을 피해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온몸 위로 날아드는 발길질은 피할 수가 없었다.
홍성만은 소파에서 온몸을 잔뜩 웅크린 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이리 채이고 저리 짓밟혀 신음을 토해내며 움찔움찔하다가 마침내 `악!` 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번쩍 두 눈을 떴다. 꿈이 아니었다. 환각도 아니었다. 무의식의 깊은 수렁 속에 빠져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경마를 시작한 후 간혹 경주 예상이거나 그날 경주의 결과에 관한 말 꿈을 꾸는 경우는 있어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홍성만은 마치 죽음의 늪을 헤엄쳐 나온 사람처럼 신음 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정말 누구에게 작신 맞거나 짓밟힌 것처럼 온몸의 통증이 느껴졌다. 갑자기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이러다가 정말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와락 겁이 나고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훅!` 하고 숨을 내몰아 쉬고는 뚫어지게 앞을 보았다. 순간 두 손가락에 여전히 걸려 있는 담배를 바라보았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인 다음 한 모금 길게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다시 한 모금을 들이마시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평온함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한참동안 입 안 가득 품고 있던 담배연기를 조금 전보다 더 길게 내뿜었다. 비로소 잔뜩 굳어 있던 얼굴의 표정도 서서히 풀어졌다.
"중독이여, 중독!"
김달오의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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