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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 VS 꾼 - 제2화 "유혹" (1) |
이혜진이 경마장의 관람대에 들어선 시간은 제2경주가 막 시작되고 있을 때였다. 발주대를 박차고 나간 경주마들이 자리다툼을 시작한다. 제2경주는 유별나게 선행마가 많은 신마들의 경주이기에 자리싸움에서 밀려나면 입상은커녕 순위에서도 밀려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기수들도 혼신의 힘으로 경주마들을 밀어붙인다. 그러나 같은 능력이라면 발주대 안쪽에 자리 잡은 경주마들이 유리한 것이 자명한 일이라는 듯 이내 1번, 2번, 4번경주마들이 앞선 채 줄을 지어 4코너를 향해 질주를 해 간다. 벌써부터 경마장 이곳저곳에서는 성원을 보내는 건지 야유를 보내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들이 저 먼 경주로를 향해 내던져지고 있다. 이혜진은 흘낏 핸드폰 액정화면에 표시된 시간을 확인하고, 약속했던 럭키빌이라고 이름 지어진 신관4층을 가기 위해 해피빌이라고 이름 지어진 구관의 복도를 가로질러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곳으로 바쁜 걸음을 걷는다. 긴 복도 곳곳에도 모니터가 설치된 곳이면 어김없이 사람들이 모여서서 제각기 다른 표정들로 모니터를 노려보며 탄성과 원성들을 토해낸다.
"돌겠네! 돌겠어!"
택시기사의 푸념소리에 뒷좌석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던 손영무가 살며시 실눈을 뜬다.
"꿈쩍을 않네. 꿈쩍을 안 해! 차란 차는 다 이리로 쏟아져 나왔구만? 빌어먹을!"
택시기사는 연신 푸념을 해대고 손영무는 슬그머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남태령을 넘어 선 지점의 앞과 뒤와 옆이 자동차들로 꽉 막혀있다. 움직이지 못하는 다른 차안에 있는 사람들의 제각기 다른 짜증스런 표정들이 보인다. 손영무가 마치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이
"그래도 남태령은 넘어왔네요?"
하고 조심스레 기사에게 말을 건네자 괜스레 혼자서 붉으락푸르락 열을 내던 택시기사는 손영무의 말투에 이내 열을 삭히고
"고개 하나 넘어오는데 만 삼십분 걸렸습니다."
하며 애써 태도를 바꾼다. 손영무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차라리 여기서부터는 걸어가는 게 빠를 것 같네요. 그죠?"
하고 택시기사의 반응을 살피자 택시기사는 잠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주위를 살피더니
"그러실래요? 나도 방향을 한번 돌려보겠습니다. 저쪽도 마찬가지지만 이쪽보다는 좀 낫겠네요."
하며 한숨을 내쉰다. 손영무는 다시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이거 미안합니다. 전철을 타고 오는 건데..."
하고 말끝을 흐린다.
"이게 어디 손님이나 제 잘못인가요?"
택시기사가 오히려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손영무가 이만 원을 꺼내 기사에게 건네주며
"잔돈은 됐습니다."
하고 차 문을 열고 내리는데
"좋은 거 하나 건지십쇼."
하는 택시기사의 소리가 차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다. 손영무는 다시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양방향으로 꽉 막힌 도로를 가로질러 간다. 서로 엉키어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자동차들 안에서 사람들이 크락숀들을 울려대고 라이트들을 반짝이고 욕설과 삿대질들을 해댄다. 손영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털레털레 걷는다. 멀리 청계산과 관악산 끝자락들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는 한곳에 동그마니 자리한 경마장의 모습이 보인다.
`띵동-`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틈에 손영무도 끼어 있었다. 사람들에 떠밀려가듯 긴 복도를 걸어 복도 끝에 다다르자 그곳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잔뜩 핏발이 선 표정들로 웅성거리며 씩씩대고 있었다. 손영무가 의아한 표정으로 기웃거리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장길수가 불쑥 손영무의 손목을 잡아채더니 반대편 복도 끝에 마련된 흡연실 한곳으로 끌고 가 윽박지르듯 물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손영무는 영문을 몰라 눈을 껌벅였다.
"차가 막혀서 걸어오느라... 그런데 왜들 이러고 있는 거야?"
장길수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 개자식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어쩐지 회사 돌아가는 게 좀 이상하다 싶었지."
"무슨 소리야?"
"문 닫았어."
하며 장길수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라이터를 켜 담배에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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