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발주대 안으로 들어서서 3경주가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출발신호와 발주대가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기수와 경주마들은, 8번마가 몸부림을 치며 발주대 안으로 들어서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것을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다는 듯이 뒷걸음들을 치며 발주대 밖으로 하나씩 다시 빠져 나온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관중들이 1경주와 2경주의 적중 실패에 대한 분풀이대상이라도 찾아냈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야! 8번 빼고 해라!"
"발주대로 들어서지도 못하는 놈을 왜 출전 시켜?"
"씨팔! 훈련을 시키기는 한 거야?"
"저런 놈이 막상 경주가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빵하고 쏴먹더라구."
"진짜 8번 저놈 사고치는 거 아냐?"
하며, 이런 외침들이 기수나 발주요원들의 귀에까지 들리지 않을 줄 뻔히 알면서도 버럭버럭 소리들을 질러대고 투덜댄다. 박종원은 초조한 표정으로 그 런 모습들을 둘러보다, 모든 것이 뒤얽힌 실타래처럼 풀어낼 방법이 없는 지금의 암담한 상황을 절감하고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마른 침을 삼킨다. 이 암담한 상황의 시작이... 그래 그날부터 시작되었나보다.

쏟아 붓듯 억센 빗줄기가 떨어져 내리던 깊은 밤, 이따금 자동차의 불빛들만이 어둠에 묻힌 거리를 가르며 지나쳐가는 항구도시의 어둠 속으로 검은색 승용차 하나가 빨려들고 있었다. 달리는 차안 에는 규태가 운전을 하고 있었고 그 곁에는 종원이 앉아 있었다. 둘은 도시의 깊은 어둠만큼이나 무거운 침묵으로 쉭-쉭- 윈도우브러시가 마찰음을 내며 빗줄기를 걷어내는 앞 차창너머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키고만 있었다. 자동차는 으슥한 골목으로 빠져들어 폐가들처럼 늘어선 창고들을 지나쳐 셔터가 내려진 어느 창고 앞에 멈춰 섰다. 규태가 신호음처럼 크락션을 두어 번 울리자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던 듯 닫혀있던 셔터가 스르륵 올라가고 자동차는 빨려들듯 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창고 안 한 구석의 조그만 뿌연 전구에서 뿜어내는 흐릿한 불빛아래 임대호가 서 있다가 그의 곁으로 승용차가 미끄러져 가서 멈추자 그는 마치 잘 훈련된 병정처럼 벽스위치를 올리고 이곳저곳에 흐트러져 있던 자동차 부품들과 공구들 틈에서 두어 개의 공구를 집어 들고 승용차의 시동이 꺼지기를 기다리는 듯 승용차를 바라보고 서 있다가 승용차의 시동이 꺼지자 아무 말 없이 승용차 앞으로 가서 익숙한 솜씨로 번호판을 떼어내고 다른 번호판으로 교체를 했다. 재빠른 솜씨로 앞 번호판을 교체한 임대호가 이번에는 뒤로 돌아가 뒤의 번호판을 교체하기 시작했다. 차안의 규태와 종원은 닫힌 차창 안에서 담배를 피워 문 채 사이드미러와 백미러를 통해 묵묵히 작업을 하고 있는 임대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침내 임대호가 번호판 교체작업이 끝난 듯이 장갑을 벗으며 운전석 쪽으로 다가오자 규태는 차창을 열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임대호는 돈을 받아 대충 쓱 보고는 작업복 호주머니 안으로 쑤셔 넣었다. 규태가 승용차의 시동을 다시 켜고 스르륵 후진을 뒤로 밀려나자 임대호는 다시 벽스위치를 내렸다. 차고 안은 조그만 뿌연 전구하나에서 뿜어내는 흐릿한 불빛만 남겨둔 채 다시 어두워졌다. 승용차가 빠져 나오자 셔터는 이내 다시 닫혀졌다. 승용차는 다시 헤드라이트를 밝히며 억센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폐가들처럼 늘어선 창고골목을 빠져나갔다.
"어때 멋있지?"
빗속을 한참동안 달리는 동안에도 이어졌던 무거운 침묵을 깨트리며 종원이 피우던 담배를 차창 밖으로 내던지고 히죽 웃어보였다. 규태는 아무 대답도 없이 묵묵히 운전만 하고 있었다.
"말 한마디 않고 서로 각자의 일을 해낼 수 있잖아? 우린 말이야! 지금 프랑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일을 처리 한 거야."
종원이 스스로에게 감탄이라도 하듯 과장되게 고개를 꺼덕거렸다.
"프랑스 영화처럼...?"
규태가 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종원이 마침내 입을 열어보이는 규태를 보고 더욱 신이 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래. 아랑드롱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고독이란 영화였는데..."
하느데
"넌 언제나 네가 하는 일을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얘기하더라?"
하고 다시 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난 영화의 주인공처럼 살아갈 거야. 케리쿠퍼, 크락크케이블, 험프리보가트, 버트랑카스타, 커크다그라스, 그레고리펙, 찰톤훼스톤, 마론브란도, 몽고메리크리프트, 제임스딘, 폴뉴만, 아랑드롱, 쟝폴벨몽드, 로버트드니로, 알파치노, 더스틴호프만, 실베스타스텔론, 이소룡, 성룡, 이연걸, 주윤발..." 종원이 마치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이 눈을 감은 채 외국영화배우들을 읊조리는데
"허리우드에 가보고 싶지 않아?"
하고 규태가 물었다.
"가보고 싶지."
종원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