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얼마나 됐는지 알아?"
이혜진이 손영무에게로 향했던 시선을 떨어트리더니 핸드백을 열고 손수건을 꺼내며 묻는다.
"한 오년 됐나?"
손영무가 씁쓰레 미소를 짓는다.
"그래... 오년 쯤 됐을 거야..."
손영무는, 그녀가 예전의 성품답게 단호하게 잘라 대답하지 못하는 것으로 봐서 그만큼 모든 것에 지쳐있다고 생각한다.
"참 우리 인연도 웃기는 인연이야."
그녀가 실없는 미소를 짓다가
"모두 내 잘못이지만..."
하고 말끝을 흐린다.
손영무는, 그녀가 자신을 유혹하고 달아나버리고 다시 나타나고 또다시 달아나기를 되풀이 했을 때마다, 자신과 그녀와의 인연이 우연인지 필연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던 날들을 기억해낸다. 선연인지 악연인지에 대해 고뇌하고 갈등했던 날까지.
"우리 첫날 기억해?"
이혜진이 멋쩍은 표정으로 촉촉이 젖은 눈가를 닦아내며 묻는다.
"우리 첫날...?"
손영무는 다시 씁쓰레 미소를 지어 보인다. 직장동료로서 함께 일하던 때, 동료의식이상의 아무런 감정도 느껴보지 못한 상태에서 송년회파티가 있었던 날, 흠뻑 취한 그녀를 들쳐 업고 모텔 방을 들어설 때까지도 그녀와의 이해할 수 없는 이러한 인연이 계속되어지리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는 만취한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그녀가 잠든 침대아래 한구석에서 벽을 기대고 쪼그려 앉아 밤을 지새우다 웅크린 채 잠이 들었었다. 아침이 되어 샤워를 끝내고 커튼 틈 사이로 스며든 화사한 빛을 받으며 촉촉이 젖은 채 화장기 하나 없는 순백한 얼굴과 늘씬한 몸매를 들어내며 요염한 자태로 다리를 꼬고 앉아
"나 어제 많이 마셨지?"
했던 그녀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아니 사랑하게 될 것만 같았던 그날을 기억해낸다.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었나보지?"
하고 그녀의 촉촉이 젖은 채 벌고 벗고 있는 모습을 넋 나간 듯 바라만보고 있었던 자신에게 던진 그녀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두 눈만 껌벅이고 있을 때  
"그렇잖아? 아니라면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옷을 입힌 채로 잠자게 하진 않았을 것 아냐?"
하며 요염기 넘치는 얼굴로 쌩긋 미소를 짓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도 많이 취했었어."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지금은 어때?"
하고 그녀가 거울 속에서 쌩긋 미소를 지어 보였었다. 아! 그 유혹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그는 기꺼이 그녀의 쌩긋 지어보이는 미소와 화장기 하나 없는 순백한 얼굴과 촉촉이 젖은 몸에서 뿜어내는 너무나도 강렬한 유혹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말았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거의 매일 말로 온몸으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던 날들을 기억해낸다.
그녀의 놀라운 섹스테크닉과 온몸으로 느끼던 그녀의 섹스감각으로 보아 자신이 첫 남자는커녕 이미 상당수의 남자들과 관계를 가져왔던 여자라는 것을 느끼면서도, 지금 세상에 유치원에서 납치를 해오지 않고서야 어떻게 여태껏 순결을 간직해오고 있다가 자신에게 순결을 바칠 여자가 있겠느냐는 절망감 가득한 자기합리화로 그녀의 과거를 묻어두고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해주기를 바랬던 날들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그녀가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상류사회에서만 살아보고 싶어. 나 그렇게 살수 있게 해줄 수 있어?"
하더니 결국엔
"나 남자 생겼어."
하고는 구두 뒷굽으로 바닥을 때리는 소리를 내며 자신에게서 떠나 가버리고 난 후 2년 만에 경마장에서 다시 만나 기껏
"경마 잘해?"
하고 묻고는
"경마 잘하면 맞춰줘. 돈 딸 수 있게 해달란 말이야."
했던 그녀에게, 경마장에서 1년 조금 넘는 날들의 삶의 대부분을 허비하며 벌어들였던 예금통장의 전부를 건네주고 마음을 건네주고 미련을 건네주었던 그 날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다시 3000여만원의 적중마권을 가지고 자신에게서 달아났던 그녀를. 그리고  다시 2년 만에, 자신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는 아무런 관심조차 보이지 않은 채
"내일 좀 만나줄 수 있겠어?"
하고 그녀가 전화를 해왔을 때, 그는 이번에도 거절하지 못하고 어김없이 그녀가 지시한 약속장소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