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다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긴 숨을 몰아쉬고
"그 다음주 경마날에... 여기서는 자기를 다시 만나게 될까봐 겁이 나서 장외지점으로 가서 경마를 하려고 했었어. 근데... 베팅을 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큰돈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유혹에 하루 종일 빠져 있었으면서도 어느 말에 얼마나 베팅을 해야 할지를 몰랐어. 자기가 왜 경마가 어렵다고 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어. 그날부터 자기가 그랬다던 것처럼 나도 베팅을 하지 않고 경주를 분석하고 추리하고 가상의 예상을 해보고 경주를 지켜보고 적중시키지 못했을 때마다 적중시키지 못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찾아내고 다시 분석하고 추리하고 예상하고 가상의 베팅을 해보고... 그렇게 한 반년쯤을 해보니까 무조건 베팅부터 할 생각을 했던 경주에 대한 모든 생각들도 바뀌게 되었고... 마침내 자기처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어떤 경주든 분석하고 추리하고 예상하고 적중을 해낼 수 있는 분석력과 예견력을 가지게 되었어. 그래서..."
하더니 다시 말을 멈추고 그가 자신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를 살피고는 다시 말을 이어간다.
"난 자기와는 달리 하루에 한 경주씩 가장 낮은 배당이면서도 가장 확실한 경주에만 큰 돈을 베팅해서 승부를 걸었어. 비록 배당이 적어도 거의 실패하지 않은 적중결과 때문에 매주 마다 큰돈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어. 오늘로 꼭 일년이 되었던 날이야."
손영무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새 떨어트리고 있던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린다. 그녀는 잠시 뭔가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핸드백을 열고 비닐케이스에 담긴 예금통장을 하나 꺼내 손영무에게 내민다.
"자기거야."
손영무는 그녀가 내미는 예금통장을 잠자코 내려다보며 두 눈을 껌벅이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본다.
"받아. 빌린 돈 갚는 거야."
하고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자기한테 빌린 거 갚고도 이보다 더 많은 돈 있어."
손영무는 다시 물끄러미 예금통장을 내려다보더니 통장을 받아 양복주머니에 넣는다.
"얼만지 확인 안 해?"
하고 이혜진이 묻는데 손영무는 씁쓰레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경마에 이긴 거야?"
하고 되묻는다. 이혜진은 씁쓰레한 표정을 짓는다.
"경마에 이긴 거라고 할 순 없지만 돈을 걸어 따내는 일엔 이긴 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겼다니까 다행이네."
하고 손영무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자기가 어느 날 왜 갑자기 경마를 버리려고 했는지 알게 됐어."
이혜진이 어금니를 꽉 깨문다.
"경마에 이기기 위해서 아니 돈을 따내기 위해서, 한주 내내 지난 경주 결과를 놓고 그 복잡하고 다양한 경우의 가정의 수와 확률과 통계를 분석해내고 다시 새로운 편성을 놓고 추리하고 예상을 해내야하는 일과, 그 모든 필요충분조건들에 확신을 갖고 베팅을 했다 하더라도 의외의 변수에 의해 적중을 실패했을 때의 허탈감 때문에 한주 내내 시달려야 하는 정신적 황망함을 감내하고 이어가며 살아가기엔, 난 아직 너무 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렇기에 내 소중한 삶의 가장 중요한 나날들을 경마로 소진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
그리고 이혜진은 입을 다문다. 어쩌면 다시는 입을 열지 않을 사람처럼. 그리고는 유리벽너머의 경주로로 시선을 돌린다. 손영무도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혜진처럼 유리벽너머로 시선을 돌린다. 그렇게 두 사람은 유리벽너머의 경주로를 바라보며 한참동안을 침묵한다.
"그런데... 왜 경마장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어?"
손영무가 침묵을 깨고 묻는다. 이혜진은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자기한테서 달아나고서... 여기서 다시 만났잖아?"
하고 대답한다. 손영무는 이혜진의 말뜻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습관인 두 눈을 껌벅여 보인다.
"기억나지? 내가 입버릇처럼 상류사회에서 살고 싶다고 했던 말?"
손영무는 씁쓰레 미소를 짓는다.
"그건 꿈이었어."
이혜진이 자학하는 듯한 어투로 말하고는
"그런데..."
하고 다시 말을 멈추고는 손영무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그를 한참 바라본다.
"여기서 자길 다시 만났어. 아까 말했지? 자기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난 자살했을 거라고?"
순간 손영무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촉촉이 젖어들고 있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