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진은, 한대웅과의 불장난과도 같았던 만남이후 그에게 마음과 몸과 그리고 그녀가 마련해낼 수 있는 돈까지 다 바치고 거의 폐인직전까지 같던 때를 기억해낸다. 값싼 여관을 찾아다니며 겨우겨우 하루하루 지친 몸을 추슬러내야 했던 날들을. 그런 처절한 하루살이생활 속에서도 매일 밤마다 꾸었던 꿈들을.
"나 사랑해요?"
찬란한 광채를 발하는 라운드브릴리언트 컷트 5캐럿의 심플하고 깔끔한 디자인의 다이아몬드반지를 청혼의 뜻을 담아 그녀 앞으로 내밀었을 때, 그녀는 감격에 겨워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었다. 남자는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보였었다. 그녀는, 남자가 내민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는 다이아몬드반지를 내려다보며 어설프게 웃어보이던 순간 두 눈이 촉촉이 젖어드는가 싶더니 기어이 눈물을 떨어트리고 말았었다. 그녀는 애써 눈물을 참으려 하지 않았었다. ''훅!'' 하며 깊고 긴 숨을 몰아쉬고는 촉촉이 젖은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었다. 남자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가늘고 긴 손가락을 남자 앞으로 내밀었었다. 남자는 한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케이스에서 반지를 꺼내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에 끼워주었었다. 순간 여기저기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었다. 잘 꾸며진 이태리풍의 레스토랑 안의 이곳저곳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두 사람을 향해 함박미소들을 지으며 진심으로 축하의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스테이지에서 은은하게 칸초네를 연주하고 있던 실내악단이 누군가의 사인을 받은 듯 ''speak softy love''를 연주하기 시작했었다. ''speak softy love''는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영화 ''대부''의 주제곡이었던 탓에 즐겨듣는 노래중의 하나였다. 이런 때 ''speak softy love''를 듣게 된 것이 마치 자신이 그토록 동경해왔던 영화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하였었다.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녀는 기어이 울음을 터드리고 말았었다.
"사랑해요. 진심이에요. 사랑해요..."
그녀는 말끝을 잇지 못하고 사랑한다는 말만 되풀이하더니 자신의 손을 꽉 쥐고 있는 남자의 손을 끌어다 가슴에 대고는 가는 어깨를 들썩였었다. 그런, 실제와는 너무나도 다른 꿈속을 헤매다가 스스로 격정적으로 흐느끼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을 때, 그 때를 기억해낸다. 남자의 모습이 한대웅이었던가? 아니 한대웅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누구였을까? 잔뜩 웅크린 채 잠들었었는지 온몸은 굳어져 있었고, 잠시 눈을 깜박이고는 눈동자만을 굴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드리워진 커튼을 통하여 햇빛들이 스며들고 있었고 침대아래 바닥으로 흘러내린 이불 틈사이로 그녀가 벗어 내던진 듯한 속옷들이 한데 뒤엉켜 있었고 서랍이 빠진 채 놓여있는 화장대와 온갖 얼룩들로 희뿌연 벽거울, ''윙-''하고 소리를 내고 있는 냉장고, 비스듬하게 버티고 서있는 옷걸이와 이곳저곳이 심하게 긁히고 움푹 팬 낡은 옷장, 볼썽사납게 뚜껑이 열린 채로 누워있는 주전자와 물때 가득 묻어있는 플라스틱 컵이 보인다. 한쪽 팔이 심하게 저려와 몸을 뒤척여 뒤틀린 팔을 천천히 내뻗었을 때 가냘프다 못해 앙상한 긴 팔과 손등과 손가락들이 드러나 한참동안을 눈을 깜빡이며 길게 내뻗은 야윈 손과 손가락을 바라보고는 손가락에 끼워져 있어야 할 찬란한 광채를 발하던 다이아몬드반지가 보이지 않았을 때 처절한 절망감이 온몸을 휘감자, 꿈이었구나!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었다. 꿈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동안을 울부짖었었다.
그녀는 그때를 다시 기억해내고는 마치 방금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진저리를 친다. 손영무가 흘낏 그런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킨다. 손영무는 다시 시선을 유리벽너머의 경주로로 향한다. 다시 침묵이 흐른다. 이혜진이 낮고 길게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고
"자길 다시 안 만났었다면... 자기가 날 도와주지 않았다면 정말 난 자살하고 말았을 거야."
한다. 손영무는 아무대꾸도 않고 여전히 유리벽 너머의 경주로만 바라보고 있다.
"자기가 나한테 준... 아니 내가 빼앗듯이 가져갔던 3000여만원어치의 적중마권 있었지? 그걸로 다음 경주에 또 베팅을 하려다가 와락 겁이 났었어. 내게 마지막 남은 돈인데 잘못되어 날려버리면 정말 다시는 자기를 볼 수 없을 것 같았어. 자기를 보지 못한다는 두려움보다 다시는 돈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고 하는 게 옳은 말이겠지."
이혜진은 영무씨라고 하던 호칭을 어느덧 자기라는 호칭으로 바꾸어 사용한다. 손영무도 그런 그녀의 바뀐 존칭에 대해 어색해하면서도 내색을 않고 잠자코만 있다. 그녀는 다시 말을 잇기 힘든 사람처럼 긴 숨을 고르더니
"그래서 그날은 적중마권 중에 한 장만을 환불하고 당장이라도 자기가 내 뒷덜미를 낚아채기라도 할까봐 정신없이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여길 빠져나갔어. 전철을 타고 가는 동안에도 한번도 고개를 돌리지 못했어. 마치 자기가 어디선가 바라보며 비웃고 있을 것 같았어. 훨씬 더 많은 돈이 예금되어 있는 현금지급카드를 주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미안함과 죄책감에 빠져있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어떻게 한 주를 보냈는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