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무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어머니는 다시 가는 숨을 길게 내쉬고는
"담에는 말 타는 데까지 찾아 갈끼다."
했다. 어머니는 정말 경마장까지 찾아 나서실 분이었다. 손영무는 침대시트 밖으로 힘없이 떨어트린 꺼칠하고 주름진 어머니의 손을 살며시 잡고 씁쓸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뇨."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말울음소리와 말발굽소리의 환청과 함께 수십 수백 마리의 야생마들이 손영무의 두 눈에서 쏟아져 나와 어머니의 두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환상을 보았다. 어머니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한참동안 손영무를 바라보더니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한번 어머니의 두 눈 속으로 빨려들어 가버린 말무리들은 손영무에게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손영무는 그날부터 2년도 넘는 날들을 경마장을 찾지 않았다. 경마장을 찾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경마자체도 잊었다. 한번 경마를 시작한 사람은 즐길 거리를 잃어야한다는 아쉬움과 반드시 이겨보고 나서야 그만둬도 그만두겠다는 잃은 돈에 대한 미련 때문에 쉽게 경마를 끊지 못한다는데도, 그는 어느 하루의 자신의 무의미한 삶에 대한 자책과 어머니의 단 한번의 단호한 요구만으로 아무런 아쉬움과 미련도 남겨두지 않고 경마를 버렸다. 그는 보통의 경마장사람들처럼 경마를 해서 큰 돈을 날리기는커녕 오히려 큰돈들을 땄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른 어떤 일에서도 얻어내지 못한 행운들을 경마에서는 얻어냈었음에도 그런 행운을 얻는 기회까지 단념했다. 그날 이후부터, 새 직장을 얻는 일을 포기하고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을 해있는 동안 대신하는 것을 계기로 어머니가 자신을 키워내기 위해 혼자서 반평생을 지켜온 재래시장의 채소가게를 도맡아 장사 일에만 전념했다. 처음에는 거래처들과의 유통관리와 주부들을 상대로해야하는 일에 서툴렀지만 이내 익숙해졌고 어머니가 퇴원을 할 무렵엔 어머니보다 더 능숙하게 장사를 해냈다. 어머니는 변화되어가는 아들에 대해 흐뭇해했고 그도 노동의 가치와 살아가는 방법과 삶의 의미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졌다. 그리고 휴일엔, 경마를 버리기 위해 서울 근교의 산을 찾아다니다가 어느 정도 등산에 취미가 붙기 시작하자 산악동호회에 가입을 하여 본격적으로 등산을 다녔다. 그가 일년 조금 넘는 동안 그토록 분석하고 연구하고 추리하고 베팅을 하며 빠져들었던 경마는, 그의 삶에 있어서 그저 한순간의 연구대상이었을 뿐 더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모든 삶은 다시 경마를 알기 이전의 제자리로 돌아갔으며, 그는 다시 되찾은 일상적인 생활에 익숙해졌고 스스로 만족해했다.

"오랜만이야."
신관 5층의 긴 복도 한곳에서, 차라리 이혜진이 자신을 발견해주기를 바라고 망연히 서성이고만 있던 손영무 뒤편으로 이혜진이 다가온다. 그가 천천히 몸을 돌린다. 그녀는 한여름인데도 가슴이 깊게 파인 짙은 회색의 긴팔정장에 녹색머플러를 하고 예전보다 더 요염한 분위기가 나는 화장을 하고 있다.
"내가 좀 늦었지?"
손영무가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아냐. 만나자고 했을 때 망설였던 것으로 봐서 안 나와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나와 줘서 고마워."
그녀답지 않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표정으로
"어떻게 지냈어?"
하고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냥..."
손영무도 이혜진을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좋아 보이는데?"
"그래...?"
"양복도 잘 어울려. 넥타이와도 코디가 잘됐구."
이혜진이 과장된 손짓으로 손영무의 양복을 쓸어내린다.
"오랜만에 입어봐서 그러는지 어색한데?"
손영무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아냐. 좋아. 그런 차림으로 같이 있으니까 전에 함께 회사 다녔을 때 같아. 오래 되었는데도 말야. 그렇지? 오래됐지?"
이혜진이 새삼스레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묻는다. 손영무는 다시 쑥스런 표정으로
"함께 회사 다녔던 때? 글쎄... 사 오년... 되었나?"
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오년."
이혜진이 단호하게 말한다.
"그렇군."
손영무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이혜진이
"저리로 가. 자리 있어."
하고는 앞서 걸으며
"그동안 정말 경마 안했었어?"
하고 묻는다. 손영무는 특유의 엉거주춤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따르며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