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무는 나직이 한숨을 내 쉬는 것으로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잠시 두 눈을 깜박이던 이혜진이
"지금 얼굴표정을 봐선 나하고 다시 시작하는 게 그리 마음 내키는 일이 아니라는 것 같네?"
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손영무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혜진에게서의 시선을 돌렸다. 이혜진은 씁쓸한 표정을 거두고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나하고 다시 시작하는 게 그리 마음 내키는 일이 아니다하더라도 난 경마 계속 할 거야. 이제야 돈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되었는데 왜 여기서 그만 둬? 그냥 돈 딸 수만 있게 해줘. 그건 해줄 수 있잖아?"
했다. 손영무는 다시 이혜진을 잠시 바라보더니
"오늘은 운이 좋았을 뿐이야. 혜진이도 보았잖아? 오늘 얼마나 적중해내기 힘들었는지?"
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 표정에는 정말로 지친기색이 역력했다. 이혜진이
"어쨌든 돈 땄잖아? 그것도 많이?"
하며 언성을 높였다. 손영무는 긴 한숨을 내쉬고
"하고 싶으면 이제 혼자 해."
하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이혜진이 그런 손영무를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조소하듯 한 표정을 지으며
"좋아! 혼자 할께."
하더니 손에 쥐고 있던 마권들을 들어보이며
"이 돈 내가 가져도 되지?"
하고 물었다. 손영무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두 눈만 껌벅였다. 순간 이혜진은 그의 대답을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 휙 몸을 돌리고, 그 언젠가 구두 뒷굽으로 바닥을 때리는 소리를 내며 카페를 떠나갔던 날처럼 다시 구두 뒷굽으로 바닥을 때리는 소리를 내며 그에게서 떠나갔다. 손영무는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망연히 서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마지막경주가 끝나고 사람들이 썰물처럼 관람대와 광장을 빠져나가고 청소용역원들이 전쟁터 같던 경마장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를 끝냈을 때까지 이혜진은 돌아오지 않았다. 1260배의 적중마권을 환급받아오겠다며 가지고가서 영영 나타나지 않았던 장길수처럼 3000여만원이나 되는 적중마권을 들고 그에게서 떠나간 이혜진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손영무는 사방이 어둑해지기 시작하고서야 경마에 패한 몇몇 사람들이 미련과 후회와 자학들을 토해내며 초라하게 경마장을 빠져나가는 틈에 섞여 터벅터벅 경마장을 나섰다.

손영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어두운 거실의 불을 켜도
"기어이 또 말 타러 갔다 오나?"
하고 물었을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방과 화장실을 노크하고 문을 열어봐도 어머니는 안계셨다. 고개를 갸웃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어머니가 말끔히 치워 내버린 예상지들이 놓여있던 자리들을 한참동안이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었다. 말끔히 치워져버린 그 텅 빈 자리가, 1년 조금 넘는 날들의 텅 빈 삶의 흔적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고 몸을 씻고 침대로 가 몸을 눕혔다. 그제야 자신이, 삶에, 경마에, 이혜진에게 지쳐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부유처럼 떠돌기만 했던 1년 조금 넘는 날들의 삶에 대한 회의와 질주하는 말들이 환영처럼 아른거렸고 환청 같은 말발굽소리들이 들려왔다. 시시각각으로 변했던 이혜진의 얼굴표정들이 말의 얼굴표정들로 바뀌는가 싶더니 이혜진의 머리를 한 말들이 경주로 사방팔방으로 날뛰고 말의 얼굴을 한 사람들과 말의 머리를 하고 사람들의 몸뚱어리를 가진 사람들이 광장에서 관람대에서 한데 뒤섞여 서로 부딪히고 울부짖는 환영들을 꿈꾸며 살며시 잠이 들었다가 현관의 벨이 울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어머니일거라 짐작하고 현관문을 열자 정복차림의 경찰 한사람이 서 있었다. 손영무가 의아한 표정으로 경찰을 보았다. 경찰은 의례적인 경례를 하고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손영무씨 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
"서말순씨가 어머님 되십니까?"
"그런데요?",
경찰은 다시 머뭇거리는 어투로
"아까 낮에도 들렸었는데 안계시더군요?"
"그랬어요? 어머니가 계셨을 텐데..."
경찰은 다시 머뭇하더니
"저와 함께 가주셔야 하겠는데요?"
하고는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손영무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일인데요?"
손영무는 눈을 깜박여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