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무가 집을 나선 시간은 너무 이른 새벽이라 아직 짙은 어둠 속에 잠들어있는 집 앞 골목을 빠져나와 큰 거리로 나섰을 때까지 오가는 사람이라고는 한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목욕탕의 네온불빛이 보일 때까지 그저 무작정 터벅터벅 걸었다. 목욕탕입구에서 호주머니를 털어내 구깃구깃 쑤셔 넣었던 천 원짜리 지폐들을 펴서 정돈을 했다. 칠천 원이 전부였다. 창구로 돈을 집어넣고 입욕표를 받아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내 다 알아봤다. 니가 토요일하고 일요일마다 말 타러 다니는 기 한마디로 도박하는 기라며?"
안개사우나실 안에 들어앉아 촉촉이 젖은 알몸 위로 흘러내리는 땀과 물기들을 내려다보며 멍한 표정으로 있는 손영무의 귓가로 어머니의 탄식이 다시 울려왔다.
"니 친가고 외가고 우리 집안에 놀음 좋아한 사람 하나도 없었다. 근데 니가 우예 고런데 빠져드나?"
장길수 때문도 1260배의 첫 적중의 유혹 때문도 아니었다. 또 적중시킨 마권을 가지고 도망을 쳐버린 장길수를 찾기 위해 경마장을 출입하게 된 것도 경마에 빠지게 된 분명한 이유랄 수만은 없었다. 모든 시작이 그렇듯이 그냥 자연스레 시작되었고 자연스레 빠져들었다. 그랬다. 그것은, 경기를 관전하는 것만으로도 또는 스스로 게임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 일인데, 경마는 경기를 관전을 하면서도 스스로 경주결과에 함께 참여를 하는 경마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성 때문이었다.
"아직 청춘이 새파란 아가 변변한 일자리 하나도 없이 빈둥거리는 꼴 보기도 애간장이 타 죽겠는데 놀음하는 거는 또 뭐꼬? 집안 아예 말아묵을라 작정했나?"
어머니의 탄식처럼 경마는 청춘이 새파란 젊은이가 변변한 일자리 없이 빈둥거리다가도 토요일과 일요일만 되면 지극히 몽상적인 꿈과 희망을 걸게 하는 주말여행의 떨쳐내기 힘든 유혹 때문이었다. 그 유혹은 등산이나 낚시나 여행이나 그 어떤 취미나 레저보다도 짜릿하고 스릴 있는 유혹이었다. 말달리는 것을 바라보고 풍부한 양과 질의 자료들을 분석하고 추리하여 1착마와 2착마를 맞추어내는 독특한 게임, 더욱이 적중을 시켰을 때는 돈을 딸 수도 있는 게임의 법칙에 따른 달콤한 유혹이었다. 손영무도 가끔은 자신의 경주예상의 놀라운 분석력과 적중률에 스스로도 놀라 차라리 경마를 생활의 방편으로 삼거나 아예 경마예상전문가로 나서볼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었다. 대다수의 경마예상전문가들도 처음에는 그저 경마를 재미삼아 시작했던 경마 팬으로부터 출발했던 사람들이었다고 하지 않던가?
"내는 이렇게는 몬 산다. 이렇게는 몬 살아..."
도리질을 하며 방을 나가시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어둑한 거실 한구석의 소파에 쪼그려 앉은 채 탄식과 비탄으로 밤새움을 했을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는 경마를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하나만을 바라보며 힘겨운 삶을 지탱하고 살아온 어머니가 가슴 아파하는 일이라면 더 이상은 계속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경마가 생활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사실로 증명해 보이더라도 어머니는 자신이 경마에 더 이상 몰입하는 것을 반대할 것이 분명했다. 한바탕 땀을 빼내고 비누거품을 잔뜩 묻혀 온몸 구석구석을 닦아내고 시원한 샤워 물줄기로 씻어낸 후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안에는 움푹 팬 채 잔뜩 충혈 된 두 눈의 사내가 온몸이 젖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래. 이렇게 무의미하게 살아갈 수만은 없는데..."
손영무는 거울 안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의 움푹 팬 채 충혈 된 두 눈을 바라보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러나 그런 자책과 갈등은 십여 분도 안 되어 금세 깨어지고 말았다. 탈의실로 나와 젖은 몸을 닦아내고 옷을 걸쳐 입는 순간 핸드폰 벨이 요란스레 울려왔다.
"나야."
이혜진이었다.
"어제는 미안했어. 전화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 이해하지?"
손영무는 대답 없이 핸드폰을 귓불에 붙인 채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어제는 어땠어? 배당들이 좀 나왔던데? 돈 많이 땄어?"
손영무는, 이혜진의 말투가 마치 자신과 그녀의 사이가 그저 경마장에서 서로 눈인사정도나 나누며 스쳐 지나치듯 경주결과나 배당에 관해서 얘길 나누는 그저 그런 사이쯤 되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이 불쾌했지만
"오늘도 경마장에 갈 거지?"
하는 물음에는 순간 이혜진에게 돈이 얼마나 남아있느냐를 묻고 싶었다. 마치 이혜진이 그런 손영무의 심정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했던 것보다 돈이 꽤 많이 들어있던 걸? 덕분에 그런대로 빚도 갚고 또 필요했던 것 좀 사느라고 쬐끔 더 꺼내 썼어. 괜찮지?"
했다. 손영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했어."
손영무가 내뱉은 ''잘했어'' 라는 대답은 ''잘됐어'' 이거나 ''오늘 경마를 할 돈이 남아있으니 다행이야'' 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의 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