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손영무는, 이년 전 그녀가 자신에게서 달아나버린 후 여태까지 그녀에 대한 미련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녀가 호텔 거피？熾【？마치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것처럼 얘기를 했을 때도,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으면서도 내심으로는 그다지 믿지 않았었다. 손영무는, 그래. 차라리 잘 된 일인지 모른다하고 생각했다. 그녀를 감당해내기란 너무 힘겨운 일이니까. 그래. 그녀가 달아났더라도 돈만 남아있다면 돼. 많은 돈도 필요 없어. 그저 내일 베팅할 만큼만 있으면 돼. 오늘경마는 비록 완패를 했지만 내일경마는 분명히 이길 테니까. 내일은, 오늘처럼 마필능력과 기수능력을 과신하지도 않을 것이고, 좀더 신중했어야 했던 경주에서 신중하지 못하고 막연한 기대감만으로 무모한 베팅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늘경마에서 패한 것은 어쩌면 그녀와 다시 시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야릇한 설렘과 두려움으로 경마에 집중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에 대한 미련은 다시없다. 그러므로 내일경마는 경마에만 집중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럼으로 내일경마는 꼭 이길 것이다.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다. 어차피 처음부터 많은 돈을 가지고 시작했던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은 경마를 이길 수 있을 만큼 누구보다도 충분히 분석하고 연구를 해왔으니까. 또한 경마에 관한 한은 행운도 따라주어 경마를 하는 사람들 중 그리 흔치 않는, 경마에 이긴 사람 중에 한사람이니까. 손영무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나서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잔뜩 굳어있던 몸을 풀어내며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고서 통장에 남아있을 예금 잔액을 확인하기 위해 버튼들을 눌러댔다. ARS음성의 지시에 따라 한참을 버튼을 눌러대고 나서, 마침내 고객님의 예금 현재 잔액은 없습니다하는 메시지를 듣고서야 넋 나간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을 떨어트렸다. 혹시 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었지만 설마 하는 심정으로 그녀와 약속했던 커피？熾【？그녀를 기다리다가 결국 그녀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갖기 시작했을 때부터 통장의 잔액확인을 해보고 싶었던 충동을 애써 억눌러왔지만 이제는 확연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녀에게 건네 준 믿음을 버렸고 대신 통장에 예금되어있던 돈의 유혹을 택했으며 결국 또 한번 자신에게서 달아남으로써 그녀의 참모습을 각인시켜준 것이라고. 손영무는 점점 가빠지는 숨결과 달아오르는 얼굴을 주체하지 못하고 심한 구토증을 견뎌내기 위해 여태까지 걸치고 있던 옷들을 하나씩 벗어내고는 겨우 몸을 일으켜 하루경마의 전투로 지칠 대로 지친 몸 위에 묻어있던 땀 냄새들을 뿜어내며 그대로 침대위로 나동그라져 엎어진 채 몸을 벌렸다. 그리고 밤새 이혜진과 예금통장과 경주마들이 한데 뒤섞인 채 ？고 ？기는 혼돈의 꿈 세계를 떠돌아다녔다.
다음날 손영무가 깨어났을 때는, 아직 어머니가 아침준비를 하는 인기척이 들리기도 전인 이른 새벽이었다. 손영무는 경마장에 가지 못하도록 기를 쓰고 말릴 것이 틀림없을 어머니가 깨어나기 전에 집을 빠져나가기 위해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방의 불을 끄고 살며시 문을 열고서 아직은 어둑한 거실을 인기척을 내지 않으려 발끝을 세우고 조심스레 한걸음씩 내딛었다. 손영무가 막 현관 앞에 다 달아 구두를 찾아 신으려 할 때
"니 기어이 또 말 타러 나가나?"
하는 어머니의 탄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영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를 뻔 하며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둑한 거실 한구석의 소파에 어머니의 형체가 보였다. 어머니는 어쩌면 밤새 저러고 계셨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둔데서 뭐하고 계신 거예요? 놀랬잖아요?"
"어데가냐고 안 묻나?"
"목욕이나 가려구요."
얼떨결에 손영무가 대답을 했다.
"목욕 가는데 와 도둑괭이처럼 하고 나가나?"
"어머니 깰까봐 그랬잖아요?"
손영무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다시 대답을 했다. 어머니가 소파에서 일어나는 기척을 했다. 거실의 불이 켜졌다. 어머니는 소파에서 일어나 아직 구두도 못 찾아 신은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현관에 서있는 손영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얘기 좀 하자."
손영무는 잠시 입맛을 다시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목욕 하고 올게요. 나중에 얘기해요."
하고 구두를 찾아 신었다.
"목욕 가는데 아무것도 안 가져가나?"
"남자들 것은 다 안에 있어요."
손영무의 대답에 짜증스런 어투가 실렸다. 어머니는 다시
"참말로 목욕만 하고 바로 올끼제?"
하고 물었다.
"예."
손영무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을 했다.
"그라먼 퍼뜩 다녀 온나. 니 올 때까지 밥 안 묵고 기다리고 있을 끼다."
손영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현관문을 밀쳐내고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