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했잖아? 은행하고 카드사하고... 또 사람들한테도 빚 많다고?"
손영무는 잠시 침묵하다가
"빚만 갚으면 되는 거야?"
하고 물었다. 순간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이혜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만한 돈 있어?"
"그 돈만 있으면 예전의 이혜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순간 이혜진이 멈칫하더니
"예전의 내 모습이 어땠는데?"
하고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어보였다. 손영무는 잠시 망설이며 적당한 표현을 찾다가
"최소한 지금 같은 모습이야."
하고 말하고는
"경마장에서 보았던 그런 혜진이가 아닌."
하고 자신의 대답에 스스로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혜진은
"경마장이 뭐 좋은 곳이라고? 누군 그런 곳에 가고 싶어서 갔나?"
하며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이고는
"근데 정말 그 돈을 줄 거야?"
하고 손영무의 눈치를 살폈다. 손영무는 다시 고개를 떨어트리고 한참동안을 침묵했다. 이혜진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손영무의 눈치를 살피다가
"커피 식어..."
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손영무가 나직이 자문자답이라도 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 앞에 놓여있던 수표들을 다시 이혜진 앞으로 밀어놓으며
"높은 이자를 줘야 한다고 한걸 보면 위험한 돈인 것 같으니 이 돈은 다시 돌려줘."
하고는 지갑에서 현금지급카드 한 장을 꺼내 수표 위에 올려놓았다. 이혜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필요한 만큼 계좌이체 시켜. 비밀번호는 내 음력 생일이야."
했다. 이혜진은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살며시 현금지급카드를 집어 들며
"여기에 그렇게 많이 들어있어?"
하고 물었다. 손영무는 대답대신 의자를 뒤로 밀치며 일어나
"7시에 다시 여기에서 만나."
했다. 이혜진이 손영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경마장 가는 거야?"
손영무가 대답을 하지 않는 것으로 시인을 하고는 계산서를 들고 몸을 돌려 카운터 쪽으로 가려는데
"있잖아?"
하고 이혜진이 손영무를 불러 세웠다. 손영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자기... 음력 생일이 언제였지?"
하고 이혜진이 미안한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보였다. 손영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날, 손영무가 하루경마를 완벽하게 패하고 축 처진 걸음으로 서울호텔의 커피？熾？다시 들어섰을 때는 이혜진과 만나기로 한 7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손영무는 패배감과 피로감으로 짓눌린 심신을 더 이상은 버텨내지 못하고 8시가 조금 지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손영무는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에 그녀가 다시는 자신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전화를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이내 단념했다. 모습을 보이지 않을 사람이라면 전화조차도 받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손영무가 건네준 현금지급카드에는 그런 유혹을 느낄 만큼의 큰 돈이 예금되어있었다. 물론 자신과 다시 시작하겠다는 여자라면 그 돈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었다. 어차피 그 돈은 두 사람의 몫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나 제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려 한다면 그 돈을 가로챌 수 있는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이혜진이었다. 손영무는 잔액조회를 해보려고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녀가 꼭 필요한 돈만을 계좌이체 시켰는지, 혹시 아직 계좌이체를 시키지 않았다면 지불정지요청을 해두는 것이 현명한 게 아닐지를 생각하다가 이내 단념을 했다. 어차피 그 돈들은 경마로 벌어들인 돈이었다. 어쩌면 그 돈들은 그녀의 몫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달아나버린 후 직장동료들이 비아냥거리는 것을 견뎌내지 못하고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고, 한동안의 실업자 신세를 지내다가 릿츠형 컨설팅회사라는 사기꾼집단의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고, 그 회사에서 장길수를 만나게 되었고, 또 장길수 때문에 경마를 알게 되었고, 경마에서만은 행운들이 따라 주어 많은 돈을 땄으니, 결국 경마를 알게 하고 돈을 따게 한 장본인이 바로 그녀인 셈이며, 그 돈들의 어느 몫은 그녀의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퍼져나는 쏴한 가슴 저림은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