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선 100M전방에 이르자 손영무의 예상처럼 앞서 달아나던 말들과 뒤따르던 말들이 한데 뭉쳐 달리며 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앞서 달아나던 말들은 여전히 지친 기색 없이 내달렸고 뒤따르던 말들은 앞서가는 말들을 따라잡기 위해 그만큼 더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6번마와 8번마는 그런대로 혼신의 역주를 하며 선두경쟁을 벌였지만 4번마는 여전히 뒤쳐진 상태에서 좀처럼 추진을 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손영무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의 함성과 함께 질주하던 경주마들이 두 사람의 시야를 지나쳐 결승선을 통과해갔다. 이혜진의 얼굴표정이 실망으로 일그러졌다. 손영무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주 좋아보였는데 승부를 안 한 것 같아. 승부만 했었다면 충분히 역전시킬 수 있었는데..."
하고 애써 아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그다지 아쉬움이 묻어있지 않았다. 대형화면에서는 결승선을 통과하는 경주마들의 모습이 느린동작으로 다시 보여지고 있었지만 이혜진은 손에 쥐고 있던 마권들을 한번 내려다보고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것들을 구겨 내버렸다.
"괜찮아. 돈 갚으라고 안할게."
손영무가 과장되게 웃어보였다. 이혜진이 발끈한 표정으로
"내가 언제 빚졌어? 영무씨가 사라는 대로 샀을 뿐이잖아?"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손영무가 다시 어깨를 으쓱하며 두 손을 펼쳐보였다. 광장의 사람들이 썰물처럼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이혜진이 몸을 돌려 그들 틈에 섞였다. 손영무는 가방을 고쳐 매고 얼마간의 거리를 둔 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벌써 출구쪽에는 광장에서 빠져나가는 사람들과 관람대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행렬로 사람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공부 많이 해놨어?"
이혜진이 손영무에게 전화를 한 것은 그에게서 달아난 지 2년만이었다. 마지막경주를 끝내고, 경마장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가득 찼던 전철 안에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입을 꼭 다물고만 있다가 내린다는 인사도 없이 훌쩍 먼저 내려버렸던 이혜진이었다. 손영무는 이혜진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기까지 한주 내내 2년 만에 다시 만난 이혜진에 대한 생각으로 몽롱한 한주를 보냈었다. 알 수 없는 분노심이 일기도 했다가 초라해진 그녀의 처지에 대한 동정심이 들기도 했다. 그녀에 대한 애증이 깊어지자 그녀를 찾아 나설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공부는 무슨...?"
손영무는 어눌한 말투로 핸드폰을 어깨위에 걸쳐 쥔 채 고개를 기울이고 예상지에 체크를 해나가고 있었다.
"내일은 이길 자신 있어? 내일은 정말 이겨야한단 말야."
이혜진은 마치 빚 독촉이라도 하는 사람 같은 어투였다.
"글쎄... 재밌을 경주는 한두 개 보이기는 하는데..."
손영무가 미처 대답을 다하기도 전에
"누가 재밌을 경주 물어봤어? 돈 딸 수 있느냐고 물어봤지? 어때? 돈 딸 수 있겠어?"
하고 이혜진이 앙칼진 목소리로 톤을 높였다. 손영무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렇긴 해."
하고 대답했다.
"그럼 지금 거기로 나와."
이혜진이 여전히 앙칼진 목소리로 명령하듯 말했다.
"거기라니?"
"우리 전에 늘 만났던 곳."
손영무는 쥐고 있던 펜을 놓고 이마를 짚고는 눈을 감았다.
"나 남자 생겼어."
하고 당당하게 말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잠시 눈만 껌벅이며 다 식어버린 커피 잔을 들고 홀짝이던 초라한 자신의 모습도 보였다. 요란스레 구두 뒷굽으로 바닥을 때리며 자신에게서 달아나던 그녀의 뒷모습도 보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손영무는 이마를 짚고 있던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거기 말고... 다른데서 만나면 안 될까?"
이번에는 이혜진이 아무 말이 없었다. 손영무는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한참 후에
"좋아. 서울호텔 커피숍으로 나와."
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영무는 어깨에 걸쳐 쥐고 있던 핸드폰의 폴더를 닫았다.
손영무는 그녀와의 약속장소로 가는 동안에 앞으로 그녀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어떻게 되기를 기대하는 지에 대하여 생각을 했다. 그러나 명쾌하고 적절한 해답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동안의 이혜진과의 관계에서 만큼은 자신의 선택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녀와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다시 시작되게 된 계기가 비록 경마때문이며 경마를 통해서라고는 하지만 경마에 두 사람의 미래를 걸어 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