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무가 고개를 떨어트린 채 이혜진의 지난 이야기들을 묵묵히 듣고 있는 동안 그녀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스스로의 울분을 삭이지 못해 연신 신음 같은 한숨을 토해냈고 그녀가 그럴 때마다 손영무는 괜스레 자신이 큰 죄라도 지은 양 흘낏 흘낏 그녀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이윽고 그녀는 그가 줄곧 무덤덤한 표정만을 지어보이자 자조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긴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일어나게?"
손영무가 떨어트리고 있던 고개를 들고 물었다. 이혜진은
"마음은 저 유리벽 밖에 있잖아?"
하며 거친 동작으로 핸드백을 어깨에 걸쳤다. 손영무가 흘낏 유리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 발주대로 경주마들이 들어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만 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 앞에서 더 이상 해줄 얘기도 없어."
하고 이혜진은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손영무는 머쓱한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어깨에 들쳐 메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복지관을 나와 주로내공원 입구 쪽으로 걷기시작하자 스피커를 통하여 아나운서의 열띤 경주중계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환청처럼 관중들의 함성도 들려왔다. 손영무는 저도 모르게 경주로 쪽으로 고개를 길게 내밀었다. 이혜진은 그런 그를 흘낏 보더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언제부터 경마한거야?"
그녀가 앞서 걸으며 물었다. 손영무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한 일년 됐나...?"
했다.
"원래 이런 거 기웃거리거나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잖아?"
"그랬지...?"
손영무가 다시 멋쩍게 웃어보였다.
"그동안 좀 땄어?"
"글쎄... 아직은 뭐 그냥 그래..."
"좀 따놓지."
이혜진이 혼잣말처럼 내뱉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게..."
손영무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어정쩡한 폼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손영무와 이혜진은 두 사람이 만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11경주가 끝날 때까지 함께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때까지 서로 한마디 말도 없었다. 이혜진은, 베팅을 할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도 온갖 메모와 알아볼 수 없는 각양각색의 표기들을 해놓은 손떼 묻은 예상지를 한참동안 들여다보다가 다시 뚫어지게 전광판만 바라다보는 손영무를 그저 흘낏흘낏 보며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11경주의 착순확정불이 켜지고 배당판에는 12경주의 새로운 배당이 형성되었다. 예상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또 한동안 전광판을 바라보던 손영무가 천천히 예시장쪽으로 걸음을 옮겨가자 그녀도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손영무는 마치 그녀가 뒤따르는 것을 무시라도 하는 듯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계단 끝으로 성큼성큼 내려가더니 플라스틱의자 한곳에 앉았다. 그녀도 그를 따라 곁에 앉았다. 예시장에서는 아직 기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마지막경주에 출전할 경주마들이 관리사들의 유도에 따라 제각기 다른 걸음걸이로 트랙을 돌고 있었다. 손영무는 한동안을 망연한 시선으로 그 앞을 지나쳐가는 말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말 볼 줄 알아?"
이혜진이 더 이상의 침묵을 견디기 어렵다는 듯 물었다. 그러나 손영무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말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말들 보면 알 수 있는 거야? 경마는 기수들이 장난치는 거라던데?"
손영무는 흘낏 그녀를 보고는 이내 말들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혜진은 자신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는 손영무를 보고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했지만 애써 참아내고 있었다. 두 경주 째를 복지관의 레스토랑에서 보내고 또 두 경주를 베팅도 하지 않고 그냥 지켜만 보고 있던 손영무가 마지막 경주에서는 예시장까지 와 앉아 경주마들을 살피는 것으로 보아서 이번경주에는 뭔가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고 또 베팅을 할 것이었다. 그러면 자신도 그를 따라 베팅을 할 생각이었다. 트랙을 돌던 경주마들이 관리사들의 유도에 따라 제각기의 자리에서 작은 원을 그리며 걸음을 멈추고 지하도 입구에서부터 기수들이 한 줄로 늘어서 들어오고 있는데도 손영무의 시선은 여전히 눈앞의 경주마들에게로만 향해있었다. 기수들이 한 줄로 도열해서 관중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제각기 흩어져 예정된 말들에 오르기 시작했다. 손영무는 기수들이 경주마에 오르고 다시 트랙을 돌고 지하도로 빠져나갈 때까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기수를 태운 경주마들이 지하도 안으로 완전히 빨려들어 가고 관중들도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데도 손영무는 여전히 플라스틱의자에 앉은 채 경주마들이 이미 빨려들어 간 지하도 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