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진은 한참동안을 망연한 시선으로 발주대를 바라보고 있다가
"경마로 잃은 돈 꼭 다시 찾아야 돼. 경마로 찾는 방법밖에 없어."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손영무는 흘낏 그녀를 한번 바라보고는
"언제부터 경마를 하게 된 거야? 혼자서 시작한건 아닐 것 아냐?"
하고 물었다. 손영무는 그 남자 때문에 경마를 알게 된 것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자신의 입에서 그 남자라는 지칭조차도 내뱉는 게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이혜진이, 한대웅이 이렇다 할 직업도 없는 백수에 빚투성이 뿐인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환심을 얻기 위해 값비싼 선물과 식사와 렌트한 고급승용차와 여행과 호텔 등에 쏟아 부은 돈은 얼마 되지 않아 바닥이 났다. 어느 토요일, 평일에는 이렇다 할 직업도 없는 것처럼 늘 빈둥거리다가도 토요일과 일요일만 되면 출장을 간다거나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하루 종일 전화연락조차 되지도 않다가 밤이 되어서야 모습을 나타내는 그에게 이혜진이
"도대체 직업이 뭐야?"
하고 따지듯 물어보자, 그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경마 알어?"
하고 되물었다.
"경마? 말들 달리는 거?"
하고 뜨악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이혜진에게 한대웅은 자신이 경주마의 마주이며 경마사업가라고 했다. 그녀가 경마사업가라는 생소한 직업에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그는 다음날 그녀를 과천의 경마장으로 데리고 갔다. 누구나가 그렇듯이 그녀도 처음으로 따라가 본 경마장을 보고 축구경기장이나 야구경기장보다 더 큰 이런 경기장이 있었나 하고 놀랐고, 또 축구팬이나 야구팬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경마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그리고 그가 한 경주에 베팅을 하고 잃거나 환급받는 돈들이 웬만한 직장인들의 월급보다 훨씬 많았고, 하루 열두 경주 쯤 벌어지는 매 경주마다 베팅되어지는 베팅액수가 수십억 원씩이 넘는다는 사실에 또 놀랐다. 한대웅은 비교적 안정적인 경주의 낮은 배당에 고액베팅을 하는 편이었는데 그녀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한 처음의 얼마간은 적중률이 좋아 따는 돈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딴 돈으로 빚을 갚기보다는 그녀와 함께 즐기고 소비하는 일에 열심이었고, 그녀는 그녀대로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경마로 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남자라고 여기고 그와 함께 즐기고 소비하는 것 외에는 모든 것에 무감각해졌다. 그러나 그녀가 경마라는 것이 결국에는 많은 돈을 잃는 놀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경마하는 사람들 누구나가 그렇듯이 그도 사방에 빚 천지면서도 경마날만 되면 별의별 사연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경마에 베팅할 돈을 만들어내는 재주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그나마도 한계에 부딪히게 되자 결국엔 그녀에게 돈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까짓 액수는 경마로 얼마든지 따낼 수 있는 경마사업가라고 굳게 믿고, 아무 망설임도 없이 그동안 그녀가 모아두었던 돈들을 하나씩 털어내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모아둔 돈들이 바닥이 나자 신용카드의 현금서비스를 인출해 쓰고 심지어는 은행대출을 받아낸 돈까지 모두 그에게 건네주었다. 마음 한 구석으로는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부르짖으면서도, 그녀는 그동안 그에게 건네준 돈을 되찾으려는 생각으로, 나중에는 그 전부는 고사하고 일부만이라도, 아니 그저 인출해 쓴 신용카드의 현금서비스대금과 은행대출 이자만 막아낼 수 있다면 하고, 주말만 되면 습관처럼 온갖 방법으로 돈을 만들어 내어 그에게 건네주느라 그녀도 그처럼 주위사람들에게 차츰 빚쟁이가 되고 말았다. 결국 그녀도 더 이상 돈을 만들어 낼 방법이 없어지자 두 사람은 거의 매일을 돈 때문에 경마 때문에 싸우게 되었고, 마침내 그가 그녀에게서 달아나버리는 것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끝이 났다. 그녀가 손영무에게 그랬듯이. 그녀는 경마일이 되면 그를 찾아내기 위해 거의 매일을 과천경마장과 장외지점들을 헤집고 다녔지만 경마장 뿐 아니라 그와 함께 했던 다른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을 다시 볼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를 찾아내는 일에 지쳤고 마침내는 그를 찾는 일을 포기했다. 그녀는 스스로 경마를 하기로 결심하고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처지에서 겨우 구걸하다시피 만들어 낸 돈들을 들고 닥치는 대로 베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경마에 관해서 거의 초보였고 또 행운도 따라주지 않았다. 그녀는 점점 더 많은 돈을 잃어갔고 결국 그녀에게는 깊은 절망감밖에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경마장에서 손영무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자신이 달아나버렸던 그와 새삼스레 마주친다는 것이 두려워 애써 피해오다가, 몇 번이고 그가 적중시킨 마권들을 가지고 환급받는 것을 훔쳐보다가, 어쩌면 그가 경마를 잘 알고 또 그만큼의 행운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심리로 그에게 의지해보기로 작정하고, 수치심과 모멸감을 각오하고 그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처절한 절망감이 오히려 그에게서 달아난 지 2년 만에 마주친 남자에게 경마 잘해? 하는 첫마디로 묻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