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무는 이혜진의 빈 물 컵에  자신의 컵에 있던 물을 따라주었다. 이혜진은 다시 컵을 기울여 목을 추겼다.
"양부장이라고 기억해?"
이혜진이 물었다. 손영무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글쎄... 나... 사람 이름하고 전화번호 잘 기억 못하는 편이잖아?"
했다. 이혜진이 어설프게 미소를 지으며
"우리 팀하고 두어 번 거래를 했던 컨설팅회사 사람 있어."
하자 손영무는
"그래. 있었던 것 같네."
하고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 인간이 어떻게 양부장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양부장을 따라 투자설명회에 왔다가 거기서 나를 본 후 소개를 시켜달라고 했었던 모양이야. 양부장은 그 인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 채 그저 그 인간이 빚을 얻은 돈이든 어떤 돈이든 씀씀이가 커 보이는 것만을 보고 돈 꽤나 있는 인간으로만 지레 짐작을 했었던 거지..."
하더니 이혜진은 순간 어금니를 꽉 깨물며 신음 같은 한숨을 내 쉬었다. 그 남자에게 그 인간이라고 말한 것이 어떤 의미에서든지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손영무는 여전히 눈만 껌벅이며 이혜진을 보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녀와 함께 근무했었던 투자회사와 몇 번 거래를 했던 양부장이란 사람이 그 남자의 허세와 돈 씀씀이만 보고서 재력가라 여기고 덥석 그녀를 소개시켜주었고, 그녀는 양부장의 소개도 있었지만 그 남자가 부리는 허세와 과시를 스스로 부풀려 짐작하고서 그 남자가 상류사회의 귀부인처럼 살게 해 줄 남자로 믿고 싶었다는 얘기라고 손영무는 이해했다. 이혜진은 때로는 침통하게 때로는 증오심 가득 찬 표정을 지어보이며 애써 진지하게 이야기를 계속했지만 손영무는 그다지 심각하게 듣고 있지 않았다. 신중하게 귀를 기울여 들어두어야 할 얘기도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그 남자가 이혜진에게 온갖 허세를 부리면서 그녀를 유혹했을 것이고 그녀는 그 유혹에 쉽게 넘어갔을 것이다. 어쩌면 그 남자가 유혹을 한 것이 나이라 그녀가 유혹을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는 자신에게서 달아나 그 남자에게로 갔고 그 결과가 어찌되었든 그것은 그녀의 선택의 몫이었다. 손영무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흘낏 유리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 경주에 출전할 경주마들이 경주로로 들어서고 있는 게 보였다. 손영무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된 여자와 또 그녀가 선택했던 남자와의 실패한 연애담 때문에 벌써 두 경주 째 베팅기회를 놓치는 것에 차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번 경주는 베팅가치도 있었고 적중해낼 자신도 있는 경주였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혜진은 그 남자와의 이야기를 언제쯤에나 끝낼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늘어놓고만 있었다. 순간 손영무는 쉴 사이 없이 주절대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아버릴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면서도 한 때 사랑을 했었던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겨우겨우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손영무는 표정관리에 그리 능숙한 남자는 못되었다. 그의 얼굴 표정에는 무료함이 가득 차 보였고 그의 두 눈은 초점을 잃은 채로 그저 습관처럼 껌벅이고만 있었다. 이혜진은 순간 이야기를 멈추고 그의 풀린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손영무는 그녀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풀린 눈빛으로 여전히 두 눈을 껌벅였다. 이혜진이 한숨과 함께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듣기 싫을 얘길 늘어놓았네."
그제야 손영무는 제정신이 든 사람처럼 움찔 놀라며
"아! 내가 깜박 다른 생각을 했나봐."
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혜진은 맥 빠진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떨어트렸다. 손영무는 순간 그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무슨 말이든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적당한 말을 찾다가 대뜸
"근데... 경마는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물었다. 이혜진이 고개를 들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손영무를 바라보았다.
"내 얘기 하나도 안 들었어?"
하고 이혜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힐난하듯 물어오자 손영무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심으로는 내가 이미 나하고 아무 상관도 없게 된 혜진이 얘길 들어주어야 할 이유가 뭐지? 더구나 그 남자와의 얘기를? 하고 발끈하며 되쏘아주고 싶었지만
"나 원래 남 얘기 듣고 나서도 잘 정리를 못하는 편이잖아?"
하고 다시 쓴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혜진은 고개를 돌려 유리벽 밖을 바라보았다. 손영무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유리벽 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발주대 뒤편에서 경주마들이 기수와 관리사들의 유도에 따라 제각기 원을 그리며 발주대로 들어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