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진이 손영무에게서 달아나기로 작정했던 날은, 손영무에겐 조금의 귀띔도 해주지 않은 채 이미 사표를 낸 후였고 핸드폰번호도 바꾸어버린 후였다. 손영무는 몇 번쯤인가 그녀를 집 근처까지 바래다 준 적이 있었지만 굳이 그곳을 해매면서 까지 그녀를 찾아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그녀가 자신의 곁에서 떠난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떠나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나보다. 손영무는, 이혜진이 떠나버린 직장 내에서 주위의 의아한 시선들을 받으며 근무를 계속한다는 것이 불편해져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와 갑자기 회사를 그만 둔기가?"
어머니는 잘 다니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때려치우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빈둥거리는 아들을 바라보며 며칠째 속만 끓이다가 작정을 하고 손영무를 붙잡고 늘어졌다.
"나하고 맞지 않는 일 같아서 다른 일 한번 찾아보려구요."
손영무는 특유의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심정을 대변해 보였다. 
"지금이 을매나 힘든 세상인데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딴 일 찾는다는 기가? 갈수록 실업자가 는다는 뉴스 못 보나?"
어머니가 어이없고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다른 일이 있겠지요."
손영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뿐이었다.
"어데서 어서오이소하고 니 기다리고 있는 데가 있다더나?"
어머니의 우려처럼 손영무를 기다리고 있는 일자리는 없었다. 아니 손영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란 게 쉽게 찾아지지 조차도 않았다. 이년 조금 넘는 날들을 무위도식하며 지내다 겨우 얻어낸 일자리가 장길수를 만나게 된 릿츠형 투자사라는 유령회사였다.
그사이 이혜진은 어떻게 지낸 걸까? 손영무는 여전히 그늘진 표정으로 유리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이혜진을 흘낏 보며 새삼스레 그녀의 이년 조금 넘는 동안의 생활이 궁금해졌다.
이혜진이 떠나버리고, 얼마동안 직장동료들의 비웃는 듯한 시선들을 받아내며 직장을 다녔을 때 간혹 그녀의 소식을 듣기는 했었다.
"이봐 손형! 이혜진씨 요즘 만났어?"
"어떻게 된 거야? 헤어진 거야?"
"이혜진씨한테 차인 거야?"
"둘이 웨딩마치 울릴 줄 알았더니?"
"하긴 손형하곤 좀 안 어울리긴 했어."  
"이혜진씨 몰라보게 달라졌데?"
"나도 우연히 봤는데 그 비까번쩍한 외제 차 있지? 어떤 남자하고 차에서 내리는 걸 봤거든? 회사 다닐 때 하고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더라고? 아니 실은 회사 그만 두기 좀 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었지? 아무튼 같이 내리던 남잘 보니까 요즘 잘나간다는 벤처의 중역이상은 되어 보이더라고?"
하고 떠들어들 대며 손영무의 반응을 살피곤 했다. 그런 때마다 손영무는 그저 특유의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으로 반응을 해보였고, 남 잘 안되는 꼴을 내심으로 즐겨하던 동료들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닌 것에 오히려 자신들이 더 실망스런 표정들을 짓곤 했었다. 어쨌든 손영무 곁을 떠난 후의, 그녀의 모든 여건들은 한결 좋아지고 풍요로워진 것 같았다. 그녀가 입버릇처럼 말해왔던, 상류사회의 귀부인이 되어가는 환경에 잘 적응해 가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때문에 손영무는 진심으로 그녀를 위해서도 그녀와의 한 때를 자신의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노력했었고, 실제로 그리 오래지않아 그녀를 완전히 잊게 되었다.
"내 얘기 궁금해?"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 없이 유리벽 밖을 바라보고 있던 이혜진이 물었다. 손영무는 시선을 돌려 여전히 그늘진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를 흘낏 보고는 다시 특유의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 얘기 더러 들었을 거 아냐?"
이혜진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글쎄... 그저... 확실히는 잘 몰라."
손영무가 어눌한 말투로 느릿하게 대답을 하자 이혜진은 손영무가 그랬던 것처럼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자신의 얼굴표정에 드리워진 그늘을 벗어내려 애썼다.
"회산 왜 그만뒀었어?"
이혜진이 물었다. 손영무는 그녀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사람들이 많이들 쑤군댔던 모양이지? 손영무씨 그런 분위기 견뎌내지 못하잖아?"
하며 이혜진이 쓴 미소를 지어보였다. 손영무는 그런 처지가 될 줄 뻔히 짐작하고서도 마치 고의적으로 그랬다는 듯 얘기하는 이혜진의 말투에 맥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정작
"나 원망 많이 했었지?"
하는 이혜진의 물음에는
"상류사회의 귀부인으로 만들어 줄 남자를 만났나보다 하고 생각했지 뭐."
하며 특유의 씁쓸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