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제 많이 마셨지?"
핸드백에서 샘플용 스킨을 꺼내 손바닥에 털어내며 이혜진이 물었다. 손영무는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많이 마시긴 많이 마셨나봐. 여기까지 온 기억이 전혀 나질 않으니."
이혜진은 털어낸 스킨을 두 손바닥으로 비벼 얼굴에 발라내고 다시 로션을 털어내 얼굴에 마사지하듯 톡톡 두 볼을 두드려댔다. 손영무는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말이 없었다.
"있잖아?"
이혜진이 거울을 통해 손영무를 바라보며 불렀다. 손영무가 흘낏 시선을 돌렸다. 늘 세련된 화장을 하고 있던 이혜진과는 전혀 다른 이혜진이 거울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상시 풍겨냈던 세련미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화장기 하나 없는 이혜진의 얼굴은 참으로 깨끗했다. 순간 손영무는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사랑하고 싶어졌다. 샤워를 끝낸 후의 여자의 모습이 참 아름다울 거라는 그저 막연한 상상을 한 적은 있었지만, 이토록 눈부시게 순백한 것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될 줄은 몰랐다.
"왜 그래?"
손영무가 넋 나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이혜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냐...."
손영무가 화들짝 깨어나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었나봐?"
이혜진이 샐쭉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서 요염기가 반짝했다. 손영무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이며 두 눈만 껌벅였다.
"그렇잖아? 아니라면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옷을 입힌 채로 잠자게 하진 않았을 것 아냐?" 
이혜진의 얼굴에 다시 한번 요염기가 스쳤다.
"나도 많이 취했었어..."
손영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뿐이었다.
"지금은 어때?"
이혜진이 거울 속에서 쌩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손영무는 상기된 얼굴로 두 눈을 껌뻑일 뿐, 비록 거울을 통해서이지만 차마 이혜진을 바로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트렸다. 이혜진이 몸을 돌려 앉아 손영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천천히 일어나 손영무에게로 다가와 앞에 섰다. 그녀가 걸치고 있던 바스타올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렇게 시작된 손영무와 이혜진의 관계는 연인사이로 급속도로 진전되었고 거의 매일 말로 온몸으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혜진은 말로 온몸으로 사랑을 확인하면서도 늘 손영무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여자같이 말하고 행동을 했다. 그녀는 툭하면
"내가 왜 다른 직종을 뿌리치고 개발투자회사에 입사한 줄 알아? 지금은 비록 좋은 물건과 투자자를 연결해주는 일을 하지만 언젠간 내 자신의 투자를 위해 배워두려는 거야. 정말 언젠가 한번은 확실하게 투자를 해서 큰돈을 벌고 말거야. 큰돈을 벌어서 소설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상류사회에서만 살아보고 싶어. 나 그렇게 살수 있게 해줄 수 있어?"
하고 묻곤 했다. 그대마다 손영무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그래. 그래야지."
하며 움츠려 들곤 했다. 이혜진은 그런 때마다
"자신 없어?"
하고 되물었다.
"그런 게 자신만 가지고 되는 일은 아니잖아?"
하고 이혜진의 눈치를 살피면 그녀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이렇게 자신 없어하는 남자에게 어떻게 내 인생을 맡기지?"
하며 
"어디 날 상류사회의 귀부인으로 만들어 줄 남자 없나?"
하고 손영무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는
"나 달아나버리면 어떻게 할 거야?"
하며 까르르 웃어보였다. 그런 때마다 손영무는 초라하게 움츠려드는 스스로에게서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결국 이혜진은 자신의 말처럼 손영무에게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직장에서도 마주치는 것을 애써 피했고, 이러저러한 이유를 만들어내며 밖에서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거나 바람을 맞히는 횟수가 늘어났다. 어쩌다 겨우 함께하게 된 밤에도 섹스는 피했다. 그러는 동안 이혜진의 의상이나 소품들은 더욱 화려하고 고급스러워졌다. 손영무는 이혜진에게, 그녀의 말처럼 그녀를 상류사회의 여자로 만들어 줄 새로운 남자가 생겼다는 것을 절감했다.
"나 남자 생겼어."
카페 한구석에서 초라한 모습을 하고 앉아있는 손영무를 바라보며 이혜진이 당당하게 말했다. 잠시 눈만 껌벅이며 다 식어버린 커피 잔을 들고 홀짝이던 손영무는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