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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 VS 꾼 - 제2화 "유혹" (16) |
손영무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겨우
"경마 해?"
하고 물었다. 이혜진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눈만 깜박였다.
"맞춘 거야?"
손영무가 눈짓으로 이혜진이 손에 쥐고 있는 마권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응."
"그래? 얼마나 샀어?"
손영무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물었다.
"조금. 내가 뭘 알아야지..."
이혜진이 말끝을 흐렸다.
"누구랑 같이 왔어?"
하며 손영무는 괜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혼자 왔어."
이혜진이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손영무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손영무와 이혜진은 잠시 동안 어색한 표정들로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눈치만을 살폈다.
"그래. 그럼 또 봐."
손영무가 침묵의 짜증스러움을 깨트리고 멋쩍게 웃어보였다.
"그래."
죄지은 표정으로 이혜진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속엔 미안함이 역력했다. 손영무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돌아섰다. 손영무가 몇 걸음 옮기는데
"저기..."
하고 이혜진이 불렀다. 손영무가 돌아보았다. 이혜진은 잠시 머뭇머뭇하며 뭔가 말을 하려다가 다시 마른침을 삼켰다. 손영무는 그녀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고 서있었다. 내심으로는 시간 있느냐? 한번 만날래? 하는 말들을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몰랐다. 아니.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줄 수 있어?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하는 말들 중에서 어느 말을 하려는 걸까? 하는 생각들을 하며 눈을 반짝였다. 이혜진은 잠시 망설임을 끝내더니
"경마 잘해?"
하고 물었다. 이런? 손영무는 실망감과 분노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경마 잘해? 라니? 2년여의 만남을 한 순간에 끊어내고 소식도 없다가, 다시 2년 만에 만난 옛 애인에게 기껏 내뱉는 첫 마디가 경마 잘해? 라니? 손영무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이혜진의 뺨이라도 갈겨주고 싶었다.
"할 만큼은 해. 왜?"
손영무는 끓어오르려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되물었다. 이혜진은 다시 머뭇머뭇하더니 손영무에게로 다가왔다. 짙은 향수냄새가 풍겨 나왔다. 손영무는 순간 비웃음을 띨 뻔 했다. 이혜진은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나 좀 도와주면 안돼?"
"도와 달라니?"
"좀... 맞춰줘."
손영무는 어이가 없었다.
"맞춰달라니?"
"경마 잘하면 맞춰달라고. 돈 딸 수 있게 해달란 말이야."
손영무는 다시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무능을 탓하며, 자신보다 훨씬 좋은 조건의 남자와의 풍요로운 삶을 찾아 떠났던 여자가, 아무리 경마장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2년 만에 만난, 자신이 버린 옛 애인에게 처음 하는 말이 경마 잘 하냐? 라니? 잘하면 좀 맞춰달라니? 이 여자가 자신의 가슴을 찢어놓고 떠나갔던 이혜진이었단 말인가? 손영무는 이혜진을 경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손영무에게 좀 맞춰줘서 돈 딸 수 있게 해줘 했던 이혜진은 막상 손영무가 경멸로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이내 시선을 떨어뜨렸다. 순간 그녀의 표정은 참담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손영무는 한참동안을 이혜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가? 이혜진은 그녀대로 한동안 고개를 떨어뜨린 채로 만 있었다.
"어디 다른 곳으로 가서 얘기 할까?"
한참 후에야 이혜진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손영무는 대답대신 먼저 몸을 돌렸다. 하긴 이런 곳에서 하염없이 동문서답 같은 대화를 마냥 나눌 수는 없었다. 벌써부터 자신들의 어색한 만남을 흘낏흘낏 곁눈질로 보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손영무가 성큼성큼 앞서 걷자 이혜진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화려하고 요염해 보이는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다소곳한 걸음걸이로 그 뒤를 따랐다.
손영무와 이헤진은 커다란 유리벽들을 통해 경마장을 바라볼 수 있는 복지관의 레스토랑 구석진 한곳에 마주앉았다. 두 사람은 망연히 유리벽 너머 저편으로 보이는 관람대의 사람들과 경주로를 바라다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곳에서 저곳을 바라보니 참 이상하네."
이혜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딴 세상 사람들 같아."
멀리 관람대를 가득 메운 채 경주로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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