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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 VS 꾼 - 제2화 "유혹" (15) |
손영무는 예상지를 대충 말아 쥐고 매표소로 가서 천원짜리 한 장을 창구 안으로 밀어 넣고 입장권과 잔돈을 받아 쥔 후 입구로 가서 아르바이트하는 학생 같아 보이는 개표원에게 입장권을 건네주고 경마장안으로 들어선다. 얼마만인가? 남아있던 모든 것을 걸고 마지막 베팅을 했던 그날 이후 경마장출입을 끊은 지 삼년쯤은 족히 되는 것 같다. 그때는 없었던 신관관람대가 구관 뒤편에서 위용을 자랑하며 버티고 서서 손영무를 내려다보고 있다. 신관에서 만나기로 했지 하고 신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예시장 앞에서 잠시 멈춰 선다.
"여기서 말들이 뛰는 거야?"
하고 예시장을 가리키며 장길수에게 물었던 경마장에 처음 왔었던 날을 떠올리고는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예시장주변이 한산한 것으로 보아 경주마들은 모두 경주로로 나갔나보다. 그래 3경주 시작할 때가 되었군. 손영무는 고개를 끄덕인다. 경주마들이 보이지 않는데도 예시장의 플라스틱의자에 몇몇 사람들이 앉아 여유로운 표정들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들의 모습에서는 경마에 빠져든 처절함이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 박장대소를 하며 즐거워하는 것으로 봐서 경마에 대한 애증이 심한부류의 사람들은 아닌 것 같다. 경마 따위에는 아예 관심도 없거나 그저 막연하게 경마를 즐기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경마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은 그들뿐이 아니다. 예시장 뒤편의 청계정근처에는 경주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는 듯 몇몇 사람들이 돗자리들을 펼쳐놓고 벌써부터 시간 이른 점심거리들을 펼쳐놓고 오붓함을 즐기고 있다. 저 사람들은 아직 유혹이란 미끼를 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손영무는 다시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관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신관의 출입문 입구에서 한 남자가 이미 다타버린 담배꽁초를 소리 나게 빨아들이더니 고개를 젖힌 채 한참동안을 허공을 바라보고는 한 순간 입안가득 담고 있던 담배연기를 훅! 하고 공중에 흩뿌린다. 남자는 여전히 허공을 향해 고개를 젖힌 채 저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씨팔! 하고 큰소리로 비명 같은 욕설을 내뱉으며 손가락 끝에 매달려 있던 담배꽁초를 거칠게 내던진다. 저만치에서 청소용역원이 긴 막대빗자루로 그 주변을 쓸고 있다가 흘낏 남자를 본다. 그러나 남자의 핏발선 눈동자와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떨어트리고 조심스레 다가와 아직 불씨가 남은 담배꽁초를 발로 밟아 불씨를 끄고 막대빗자루로 쓰레받기에 쓸어 담는다. 남자는 다시 씨팔! 하고 신음 같은 한숨을 내던지고는 손에 둘둘 말아 쥔 예상지를 휘저으며 구관관람대 출입구 쪽으로 거친 걸음을 옮겨간다. 남자가 떠난 자리에는 구겨지고 찢겨진 마권뭉치들이 흐트러져있다. 손영무는 남자가 욕설을 내뱉으며 담배꽁초를 내던지던 자리로 가서 그가 내버린 것으로 짐작되는 한 뭉치의 마권들을 주워 구겨진 것들을 펼쳐본다. 수 십장쯤은 되어 보이는 똑같은 마번의 복승식마권들이다. 청소용역원이 손영무 곁에 와서 눈치를 살핀다. 손영무는 쓴 미소를 짓고는 쓰레받기에 마권뭉치를 던져주고 신관출입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간다. 호텔로비처럼 깨끗하게 잘 해놓았다고 하더니 하며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5층인가에 있다는 정장실이라는 곳에서 만나기로 했지?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싣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관람대 각층의 많은 사람들을 한 시야에 내려다볼 수 있다. 궁색스럽고 찌든 표정의 사람들, 흘낏 흘낏 곁눈질로 주위를 살피는 사람들, 구석진 한곳에 쪼그려 앉아 예상지에 얼굴을 파묻고 연구에 열중인 사람들, 끊임없이 불만을 토해내거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람들, 당장이라도 누군가와 시비를 벌이려는 듯 눈에 핏발이 선 사람들이 보인다. 신관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구관의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예전에 손영무가 보고 부딪혔던 사람들과 똑 같은 모습들이다. 하긴 그 사람들이 단지 한 곳에서 두 곳으로 나뉘었을 뿐이다. 여유 있어 보이기는커녕 궁색기가 흐르고 삶에 찌든 모습들을 하고 있는 남자들과, 천박하게 보이는 화장에 짙은 색조의 립스틱을 바른 여자들이 구관만 있을 때만큼이나 북적거리는 걸로 봐서 경마인구는 여전히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만큼 돈들을 잃고 친구를 잃고 가정을 잃고 자신을 잃었으면 됐지 또 잃을 게 뭐가 남아서 이렇게들 잃지 못해 안달들일까? 손영무는 저절로 찌푸려진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선다. 5층에 도착하니 제법 한가로워 보이긴 한다. 하긴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한다고 정장까지 차려입고서 경마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손영무는 주위를 둘러보며 이혜진을 찾아본다.
그날, 손영무가 이혜진을 경마장에서 만나게 된 건 참으로 뜻밖이었다. 환급받은 돈다발을 어깨에 걸치고 있던 가방 안으로 쑤셔 넣으며 돌아서던 손영무는 앞을 막아서듯 버티고 서있는 이혜진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이혜진을 경마장에서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떠나버린 후 직장도 그만두고 아예 전화번호까지 바꾸고 연락을 끊은 지 이년이 훨씬 넘었는데 그 이혜진을 경마장에서 다시 만나다니. 손영무는 어이가 없었다.
"혜진이...?"
하고 손영무가 놀란 표정으로 눈을 껌벅여보이자 이혜진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목덜미가 마른침을 삼키는 것 때문에 볼록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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