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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 VS 꾼 - 제2화 "유혹" (14) |
만일 장길수가 아직도 손영무 곁에 있었다면
"손형 경마에 타고 난 거 아냐?"
하거나 아니면
"손형 꾼 아냐?"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장길수는, 손영무가 적중시킨 1260배의 고배당마권을 환급해오겠다고 가지고 간 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만일 그날, 장길수가 적중마권을 환급받아 와서 1200만원이 넘는 돈을 되돌려주었었다면, 어쩌면 그날이 경마라는 것이 운이 좋으면 큰 돈을 딸 수도 있는 특별한 도박이구나 하는 정도의 생각만을 갖게 한 처음이자 마지막경마가 되었을지, 아니면 경마 첫베팅에서 1260배의 고배당을 적중시켰다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들어 아무것도 모른 채 돈을 따기 위해 무작정 베팅만을 해대는 무모한경마를 시작하게 되었을지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손영무는 경마 첫베팅에서 1260배를, 그리고 6개월 넘는 동안 집요하게 혼자만의 경마공부를 시작한 후 또다시 첫베팅에서 601배를, 그리고 또 한번의 베팅에서도 단 한 장의 마권만으로도 적중을 시키는 놀라운 적중력을 증명해 보였으니, 스스로가 생각을 해보아도 지독히도 예측불가능하고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그동안의 다른 일들에 비해 경마에 관한한은 놀라운 예견력과 행운을 가진 것에는 틀림없었다.
손영무는 그날, 앞으로 경마를 돈을 버는 수단으로 이용할 것인가 아니면 추리와 예상과 적중의 쾌감으로 그저 즐기고 말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1경주가 지나고 마지막경주가 끝날 때가지도 그런 고민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얻어내지 못했다. 하루경마가 끝나고 손영무는 6개월 동안 늘 그래왔던 것처럼 다음날의 경마예상지 하나와 경마장 이곳저곳에 볼썽사납게 내버려져 나뒹굴고 있는 그날경주의 각종경마예상지들을 주워 모아 한 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부터 손영무는 경마를 그만두게 된 그날이 있기까지 2년 넘는 날들의, 삶의 모두를 경마에 걸었다.
손영무는 남태령 끝 길에서부터 한참동안을 걸어서야 경마장에 도착했다. 꽉 막혀 움직일 줄 모른 채 꼬리를 물고 늘어서있는 도로 위의 차량홍수에 비해서 경마장입구는 한산한 편이었다. 경마장역은 경마공원역으로 개명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북새통같이 밀려다니며 출입을 했던 경마장역입구로 새 단장을 한 또 하나의 출입구가 생겨났다. 아마 비 오는 날이나 눈 오는 날을 위해서인지 매표소 앞까지 천정 높은 투명판아치가 길게 뻗은 통로도 만들어져있다. 손영무는 예상지판매소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전에는 예상지를 제각각 판매했는데 이제는 한곳으로 다 모여 있다. 처음 경마장에 왔을 때 장길수가 그랬던 것처럼 예상지를 건네주며 질문을 하는 건지 대화를 하는 건지도 모를 얘기들을 나누는 모습들은 보이지 않는다. 기계처럼 돈을 건네주고 기계처럼 예상지를 건네준다. 더러는 일상의 숙달된 일처럼 아예 돈을 던져주고는 예상지하나를 뽑아들고 바쁜 걸음으로 사라진다. 몇 년 만에 다시 와보는 경마장의 첫 느낌부터 낯설다. 그 오래전의 첫 느낌 때처럼. 손영무는 예상지판매소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고 나서야 예전에 가장 적중률과 분석력이 높았던 예상지를 찾아내 집어 든다. 상호는 그대로인데 표지의 디자인부터 달라진 예상지의 첫 페이지를 넘길 때부터 다시 낯설다는 느낌을 받는다. 몇 페이지를 넘겨본다. 예전보다 더 다양한 자료들로 가득 차 있는데 경마를 하는 사람들로써는 너무 많은 정보량 때문에 오히려 혼돈에 빠지게 될 것 같다. 그저 단순하고 명쾌한 추론이면 족할 것을 하는 생각을 한다. 두어 페이지를 더 넘기니 추천경주라고 하여 같은 경주를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예상을 하고 있다. 누구의 예상을 선택해서 믿고 베팅을 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제각기 다른 그 모든 예상들에 모두 베팅을 하라는 것인지, 손영무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만원을 건네준다. 여자 판매원은
"싸인펜은 있으세요?"
하고 미소 띤 표정으로 묻는다. 손영무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거스름돈을 받아 호주머니에 집어놓고 다시 예상지를 넘겨가며 입장권매표소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자신이 찾는 6경주를 펼치자 구석구석 세밀히 살핀다. 예상지 의 헤드마번들 외에 또 저마다 다른 경마예상전문가들의 제각기 다른 예상의 추천마번들이 나와 있다. 그 아래 한구석에는 시물레이션이라며 경마예상전문가들과는 상당히 다른 차이를 보이는 다섯 개의 마번들과 조교우수마라고 하여 또 다섯 개의 마번들이 적혀있다. 그 옆에는 전산산정이라며 시물레이션과는 또 다른 다섯 개의 마번들이 적혀있다. 손형무는 마음속으로 `아직도?` 하며 쓴웃음을 짓는다. 모두12두가 출전하는 경주에, 제각기 다른 다섯 개의 숫자만, 예상지에서 내세운 다섯 개의 헤드마번들과, 제각기 다른 다섯 명의 경마예상전문가들의 제각기 다른 다섯 개의 마번들과, 시물레이션의 다섯 개의 마번들과, 전산산정의 다섯 개의 마번들과, 조교우수마라는 다섯 개의 마번들 등 그것들을 그냥 도합 해보면 모두45개의 마번들이 적혀있다. 12두가 출전하는 한 경주에서 중복되는 마번들을 포함해서 7두나 되는 마필들이 입상가능예상마들로 거명되고 있는 셈이다. 경마하는 사람들은 경마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 많은 경마예상지 중에서 또 경마예상지 속의 경마예상전문가들의 예상들 중에서 하나 혹은 둘이나 그 이상을 선택을 해야 하는 경마보다 더 난해한 딜레마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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