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 신사(126) - 낭만을 복원하다

↑	우영창(소설가, 시인)

40대의 동영상 제작자가 로맨스와 리얼리즘이라는 두 화두를 들고 나왔을 때 고대해는 바로 냄새를 맡았으니, 로맨스 - 남녀, 리얼리티-현장 이런 단어를 저절로 연결지었다. 이 동영상 제작자가 하는 작업은, 남녀가 등장해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되 그것을 화면으로 시시각각 정직하게 보여주는 거라고 보면 될 것이었다. 물론 로맨스의 종류와 그 범주 및 구체성의 강도 등에 따라 같은 로맨스물 내에서도 편차가 있을 수 있었다. 고대해는 질문을 하나 하였다.
"로맨스라면 여고생 취향의 그런 건가요?"
"아, 아닙니다. 성인남녀의 이야기지요, 왜 요즘은 로맨스가 사라져가는 시대 아닙니까? 사라져가는 이 아니라 사려져간 이 아닙니까? 말하자면 로맨스란 걸 찾아보기 힘들어졌지요."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낭만이 없는 시대지요."
이 말을 하고는 남자는 깊은 사색에 잠긴 듯 잠시 얼굴에 그늘을 만들고 누구도 함부로 말을 못 붙일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런 시답잖은 표정에 감동할 또는 신경 쓸 고대해가 아니었다. `그래요 낭만이 도망간 시대지요.` 하고 맞장구 칠 생각은 아예 없는 듯했다.
"그래서 낭만을 복원하시는 건가요?" 하고 고대해는 매우 사실적이교 예리한 물음을 던졌다. 고대해가 핵심을 찔러오자 남자는 "그렇습니다. 낭만을 재구성하는 겁니다." 하고 어디 영화에서 주워들은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렇군요." 고대해는 그러고는 그만이었다. 자기 앞의 술잔을 비우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 대목에선 `어머, 어떤 낭만이요? 남녀 주인공은 누굴 쓰시나요? 영화가 나을까요, 드라마가 나을까요?` 그런 질문들을 속사포처럼 아니면 조심스럽게라도 물어봐야 당연한 것인데 그러한 절차와 예의범절을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긴 어느 정돈 짐작은 했었다. 생각하는 대로 여자가 움직여 주지 않을 거라는 건. 남자는 말 없는 여자 앞에서 먼저 말을 꺼내야 할 처지임을 깨달았다. "네 그렇습니다. 낭만은 복원되어야 합니다." 남자는 앵무새처럼 지껄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것은 리얼리즘과 만나야 합니다." 드디어 리얼리즘이 등장하였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