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 신사(127) - 뭔가 벌어지겠군요

↑	우영창(소설가, 시인)

40대의 동영상 제작자가 로맨스에 이어 리얼리즘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그가 하고 있는 작업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또한 로맨스는 리얼리즘과 만나야 한다고 정의를 내림으로써 둘 사이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는 성인남녀라면 깊이 공감하는 바이지만 아직 이십대 초의 풋풋한 청춘들에겐 크게 어필하는 문제라고 할 수 없었다. 20대라면 당연히 사랑은 죽고 못 사는 것으로, 사랑을 위해 부모 국경 환경은 물론이고 한 목숨 바친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고, 그렇지 않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과감히 선언함으로써 절대사랑 그 신성한 제단 앞에 영혼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삼십대라면 그건 어불성설임을 남녀 공히 깨닫게 된다. 사랑? 좋지. 속으론 이렇게 비꼬며 남녀 공히 형식적인 사랑 타령을 늘어놓기 일쑤다. 물론 이때만 해도 사랑한다고 서로에게 말은 한다. 습관적으로 또는 상대가 안심하는 사이 무슨 딴 짓을 저지르기 위해. 이때 이들은 로맨스와 리얼리즘을 구분하기 시작하는데 로맨스가 백일몽이라면 리얼리즘은 구체적인 남녀의 합일을 뜻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리얼리즘이란 크게는, 합일까지의 과정과 합일의 전 과정과 합일 후의 파생된 문제까지 아우른다고 볼 수 있다.
이 순간 동영상 제작자가 내세우는 건 로맨스와 리얼리즘의 절묘한 화합, 즉 사랑이 어떻게 성숙한 내면관계로 하자 없이 발전할 수 있냐는 심원한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심각한 주제임과 동시에 영원한 테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중요한 작업을 하는 동영상제작자는 긍지에 찬 모습으로 고대해를 바라보았으나 고대해는 그다지 큰 감명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따져보면 고대해에게 로맨스의 시기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이슬이 아침햇살에 마르듯 그렇게 스러져가고, 그후 리얼리즘의 관계로 진입하여 몇 차례 남자와의 만남을 가졌으나 그것이 로맨스와 리얼리즘의 행복한 조우로 이어지지는 않은 케이스였다. 고대해를 감당할 수 있는 남자가 없었다고도 할 수 있었고, 고대해가 뿜어내는 아우라가 남자를 질식시키거나 지레 겁먹고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으니 이는 고대해의 책임이라기보다 운명의 장난이었다.
"로맨스와 리얼리즘이 만나면 뭔가 탄생하겠네요." 고대해는 듣기 좋으라고 한 마디 하였다. 이에 남자는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지며 "그렇습니다. 뭔가 탄생하지요. 잘 보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두 사람은 이 대목에서 술잔을 부딪쳤다. 마치 뭔가 탄생한다는 게 지금 현실 속에서 바로 일어나기라도 할 듯 말이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