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 17일 그랑프리 경마대회, 새 천년의 첫 챔피언을 뽑는 날이다. 그 당시 최고 인기마는 ‘다함께’였다. 핸디캡 60kg으로 조금 무거운 감은 없지 않지만 10월 문체부장관배에서 6마신차의 압승을 기억하는 팬들은 믿음을 보냈고, 그 다음은 ‘스트라이크테러’, ‘포트오먼’, ‘더스파이커’ 순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겨우 53.5kg의 등짐을 진 ‘즐거운파티’의 역전우승으로 끝났고, 새 천년 한국경마의 첫 챔피언은 이렇게 어이없이(?) 탄생하고 만다.
경마의 시초가 무엇인가 따지는 건 제쳐두더라도, 경마의 본질은 우수한 말이 이기고 열등한 말이 지는 것이다. 하지만 흥행을 위해 일반경주 정도는 핸디캡으로 진행해도 말이 된다. 더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지 않은가? 그러나 어떤 조건하에서 어떤 말이 가장 강한가를 판단하는 경마대회에서 핸디캡으로 진행한다? 적어도 경마대회만은 마령 또는 암수 정량으로 해야만 진정한 챔피언이라 선발할 수 있으며 경주조건도 어떤 분야의 챔피언을 뽑겠다라는 의미나 철학이 있어야 한다. 물론 최고 프리핸디캡 챔피언을 가리기 위해 편차가 심하지 않은 범위에서 한 두개 경마대회는 있을 수 있지만…
예를 들어 경주조건을 국산마 2군, 1800m, 암수오픈, 3세 이상, 핸디캡경주로 하면 대체 무슨 챔피언을 뽑겠다는 것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국산마 중에 중거리 좀 잘 뛰는 화물마를 뽑겠다는 의미인가? 이런식으로 경주를 편성한다는 것은 마사회가 경마에 대한 철학의 빈곤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나마 철학이 없는 그 조건마저도 매년 마사회가 엿장수 마음대로 하듯 바꿔버린다. 흥행적 요소와 언론사별 경마대회 배분 같은 주먹구구는 있지만 철학과 원칙이 존재해본 적이 얼마나 되었는가?
경마대회에 출전할 때 연령, 성별, 경주거리 등의 조건만 줄 뿐 나머지는 군, 수득상금 따위의 조건은 철폐해야 한다. 현재 더비나 오크스는 핸디캡으로 진행한다는 점만 뺀다면 모범적인 경마대회로 볼 수 있다. 상금도 크고 조건이 오픈되어 있어, 될만한 3세마들은 이 대회를 목표로 비교적 최선을 다한다. 핸디캡이라는 괴물 때문에 비교적(?) 최선을 다하는 한계를 갖겠지만…
경마대회 숫자가 많아서 경마대회의 질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은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경마대회는 오히려 부족할 수 있다. 그러나 경주조건이 다양하지 않아서 출전두수가 빈약해 보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원칙을 가지고 바꿔보면 어떨까? 2세마 단거리, 3세마 3관경주와 오크스, 3세 이상은 암수 오픈, 암말로 구분해서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 경마대회로 시행한다. 사실 우리나라는 암말이 수말을 이기는 체제라서 오크스를 포함한 암말 3관이 별 의미가 없지만 오크스는 현재 시행 중이라 일단 넣어본다. 이렇게만 해도 11개가 나오며 경주거리를 세분화하면 더 많은 경마대회를 소화할 수 있고 조건별로 의미 있는 챔피언을 선발할 수 있다.
경마대회의 상금을 대폭 인상하고 특히 연도 챔피언을 선발하는 그랑프리는 5위 상금이 일반경주 우승상금보다 훨씬 더 많다면 모두가 최선을 다하는 챔피언 선발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처럼 상금규모에 따라 경마대회의 등급을 매기면 경마대회의 수준 또한 나름대로 교통정리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단거리이건, 장거리이건 무조건 이기는 말만 이긴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건 아니다. 장거리에 강하지만 단거리에 약한 말도 있고 단거리에 강하지만 단거리에 약한 말도 있다. “능력마=장거리마”라는 등식으로 이점을 사장시킬 것이 아니라 경주마의 능력을 골고루 발휘하게 할 수 있는 경주를 만들어야 하며 우선 경마대회만이라도 이렇게 바꿔보자. 한때 경마팬들에게 이런 말이 회자되었다. 1200m에서 붙으면 ‘신세대’도 ‘대견’도 ‘햇빛바람’한테 안된다고…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마사회는 깊이 음미해보았으면 좋겠다.




작 성 자 : 김중회 ringo@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