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미년에는 그랑프리를 마령중량으로

그랑프리 경마대회가 핸디캡 방식으로 치러져 뒷말이 많다.
한해 최고의 경주마를 가리는 대회인 그랑프리만큼은 마령중량을 적용해 진정한 강자를 가려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에 대해 마사회는 항상 경주편성의 어려움을 이유로 내세운다.
그러나 경마 선진국을 지향하는 우리도 제도를 탄력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다. 유럽이나 북미·호주 등 대부분 세계 경마선진국에서 핸디캡 경주 비중은 매우 낮다. 핸디캡 경주는 우수마 선발이라는 경주의 본질에 반하기 때문이다. 가까운 일본도 최고 경주마를 선발하는 ‘아리마키넨’(아리마 기념)대회 출전 조건은 경마대회 3위 내 입상과 3세마 이상이라는 것뿐이다. 세계 유명 경마대회들도 핸디캡 방식으로 치르지 않는다.
경마대회는 우수마 발굴이 목적이다. 문자 그대로 그랑프리 경마대회는 최고의 우수마를 배출하는 장이 돼야 한다. 그러나 경마의 기본인 우승열패 원칙마저도 없는 현행 그랑프리 대회는 한해 최고의 명마를 배출하지 못한다.
2000년 그랑프리에서 최고 인기마 ‘다함께’보다 무려 6.5㎏이나 가벼웠던 ‘즐거운파티’가 우승한 것이 좋은 예다. 당시 ‘즐거운파티’를 우승마로 불렀을 뿐이지 그 해 최고 명마로 칭하지 않았다. 지난해도 역시 우승이 유력시됐던 ‘다함께’가 최고 부담중량으로 최하위 성적을 기록했다.
1996년 5세로 최고 전성기에 그랑프리에 출전한 ‘신세대’는 60㎏ 부담중량을 극복하지 못하고 4위에 그쳤다. 당시 우승마는 58㎏ 부담중량을 진 ‘훌라밍고’였다.
‘대견’은 94년 5세마 때 그랑프리에 도전했지만 62㎏를 달고 최하위를 기록했다. 다음 해인 95년 59㎏ 부담중량을 달고서야 겨우 그랑프리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다.
이렇다 보니 그랑프리 대회는 기본 목적인 연도 최강마를 가려내기보다는 경마대회의 하나로 그저 나눠먹기 식의 대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90년대 말 세계 최고의 명마로 불리다 은퇴한 ‘시거’의 16연승은 핸디캡 경마제도 아래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록이다.
가벼운 등짐을 메고 난데없이 나타나 그랑프리를 움켜쥐는 등의 예측 가능한 변수를 인위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또 우수마가 정도 이상의 납덩이를 짊어지고 그랑프리에서 허덕이는 모습을 경마팬들은 결코 원하지 않는다.
특히 대다수 마주들은 아무리 우수마라도 부담중량을 59㎏ 이상 달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야 명마를 보호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아무래도 한해 18개의 경마대회는 우리의 경주마 자원으로 볼 때 많은 숫자다. 경마대회 수를 줄여 그랑프리에 상금을 몰아줘 지금보다 상금이 3배정도 많게 만들자. 이렇게 되면 그랑프리 입상이 어렵다고 판단하는 마주와 조교사들이 그랑프리 대회 출전을 쉽게 포기하고 차라리 일반경주에서 입상 기회를 모색할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경마의 올림픽’으로 불리는 브리더즈컵과 멜번컵, 저팬컵 등 각 국의 다양한 경마대회를 현장에서 목격했다. 이런 경마대회에 출전하는 자체가 마주에겐 영광이며 우승은 꿈이자 목표다. 우리와는 달리 고액의 출마등록비(Stakes money)를 물어야 하는데도 출전하기 위해 아우성이다. 우승마가 탄생하는 순간 경마팬은 자신의 마권 적중여부를 떠나서 일제히 ‘명마탄생’을 환호한다.
그랑프리 경마대회를 마령이나 별정중량으로 치를 경우 많은 상금이 걸려있음에도 입상할 자신이 없어 대회 출전을 포기하는 마주들이 물론 나올 수 있다. 그래서 5마리가 출마등록을 하더라도 그랑프리만은 경주편성 예외규정을 적용해 대회를 치르면 된다. 출전마가 적어 베팅이 없는 대회로 진행해도 관전의 묘미를 즐길 수 있다면 그랑프리의 개최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될 것이다.
계미년부터는 마령중량으로 그랑프리 경마대회를 개최해 경마문화가 거의 없는 우리도 과천벌 최고의 명마를 가려내는 연말 축제를 제대로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병기 스포츠서울 부장


작 성 자 : 서병기 eheek@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