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일 93일 간 총 1094개 경주가 예정된 2002년 시즌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2주 간의 휴장을 한 주 남겨 놓은 오늘은 경마인들과 경마팬이 고대하며 기다려온 그랑프리가 열리는 날이기도 하다.
국산, 외산 가릴 것 없이 당대에 내로라하는 경주마들이 한 자리에 모여 우승을 향해 질주하는 모습은 장관 그 자체다. 우승의 주역이 되기 위해 혼신으로 관리해왔던 조교사와 관리사, 승부의 한 복판에 서 있을 기수, 경주마의 주인인 마주, 그리고 자신의 애마에게 과감히 베팅을 하고 숨가쁘게 결과를 기다리는 경마팬까지… 어느 한 사람만이 아닌 모두의 잔치가 되는 것이 바로 그랑프리다.
이런 관심과 기대가 모아지는 그랑프리지만 경주편성에 대한 아쉬움을 이번 역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출전두수가 고작 9두에 불과한 것이 1차적인 아쉬움이고, 최고의 능력마를 가린다면서 핸디캡 방식을 부여해 시행 취지를 흐린다는 점이 또 다른 아쉬움이다. 출전등록에 앞서 열렸던 경마팬 인기투표에서는 분명히 대상마가 20두였고, 출전 제한 두수는 14두인데 어찌된 일인지 막상 대회에 얼굴을 내민 경주마는 달랑 9두다. 물론 서울경마장에서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는 ‘다함께’‘새강자’‘쾌도난마’‘찰리스카즈’‘부움’‘보헤미안버틀러’등 나올만한 말들은 다 나왔다.
하지만 애초에 출전할 의사도 없었으면서 인기투표에 응한 경주마는 대체 무엇이냐는 팬들의 항의에 대해 마필관계자는, 또 경주 편성을 담당하는 마사회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나올 수 있는 능력마는 다 나온 셈이니 된 것 아니냐’는 식의 관계자들의 생각은 경마의 속성을 도외시한 것과 다름없다. 뻔한 능력마가 있어도 당일 주로 상태, 마필의 컨디션, 출전마들의 질주습성에 따른 경주전개 등 다양한 변수로 인해 의외의 결과가 돌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경마다. 9두가 출전하는 경주와 14두가 출전하는 경주의 결과는 박진감 측면에서 비교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대 상금 규모를 자랑하는, 가장 큰 대회인 그랑프리에 왜 조교사나 마주는 출전을 기피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많은 조교사들은 대회의 메리트를 별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핸디캡 방식으로 치러져 능력마일 경우는 그만큼 큰 부담을 느끼면서 우승확률은 적은 모험을 감수해야 하고, 반대로 순위권 진입도 어렵다고 느낄 때는 차라리 일반 경주에서 입상 기회를 모색하는 게 낫다는 뜻이다. 경주 출전권을 쥐고 있는 조교사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2억 원에 불과한 상금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동안 본지는 경마상금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을 수없이 해왔다. 해마다 경마상금의 확대폭이 정해져 있어 당장 원하는 수준까지 오르는데 한계가 있다면 18개에 달하는 경마대회 수를 줄이더라도 각각의 대회 상금은 지금보다 높이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사실 서울경마장은 경주마 가용 자원에 비해 지나치게 경마대회 수가 많아 대회 때마다 출전마 부족을 겪고, 흥미를 떨어뜨리며, 뻔한 결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반복해왔다. 경마대회의 권위를 높이고 시행 취지를 살리면서 마필관계자들에게는 메리트가 주어질 수 있도록 대회 규모나 상금을 조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006년까지 국제경주 유치를 추진하려는 마사회 입장에서 보더라도 경마대회의 상금 확대는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경마종사자들에게는 의욕을 고취하고, 경마팬들에게는 최상의 상품을 내놓을 수 있도록 적어도 경마대회 만큼은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하자.
매출액 7조 원을 돌파했다지만 정작 경마팬을 위한 사은 행사는 무엇을 했는지 되돌아보자. 백화점만 해도 목표 매출을 초과 달성하면 특별 바겐세일을 열고 푸짐한 사은품을 내놓는다. ‘사은품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경주나 구경할 수 있었으면…’하는 경마팬들의 바람을 마사회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경마팬과 함께하는, 경마팬과 경마인들의 잔치로 거듭날 그랑프리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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