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0월이면 美 앨링턴파크(일리노이주 시카고 소재)에서는 전 세계 경마인들의 축제, 브리더즈컵이 성대하게 펼쳐진다. 지난 84년 경주마 생산자들을 주축으로 첫 시행된 브리더즈컵은 매년 북미 지역 경마장을 순회하며 2·3세마 위주로 1200m 최단거리에서 2400m 최장거리까지 총 8개 대회를 하루에 치러내, 전 세계 경마인들에게 경마올림픽으로 불린다. 풍부한 경주마 자원을 바탕으로 마령별, 성별, 거리별, 경주로별 다양한 조건의 경마대회를 시행함으로써 명실공히 세계의 경마축제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이제 걸음마 단계에 와 있는 우리의 국산마 생산 실태에 비춰볼 때 부럽기만 한 그들의 축제가 아닐 수 없다. 국산마 생산 17년째를 맞고 있는 우리는 양적인 면에서는 공급의 극대화를 이뤘지만 질적으로는 여전히 선진 경마시행국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경마시행과 관련된 각종 제도 역시 많이 뒤떨어져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경마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축제의 장이 없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고작해야 지난주 끝난 야간경마나 연말의 그랑프리 정도만이 가슴 설레게 하는 이벤트다. 특히 야간경마는 혹서기 경주마 보호를 위해 매년 4주에 걸쳐 시행되고 있지만 이렇다할 이벤트 하나 제대로 마련되지 못해 이제 식상한 느낌마저 주고 있다. 어둠을 밝히는 경주로의 대형 조명이 장관이기는 하지만 수영복 패션쇼, 댄스 공연, 고적대 연주 등 매년 반복되는 가벼운 눈요기는 경마팬들의 높아지는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경마시행과 관련된 빅이벤트가 없기 때문이다.
경주마 자원이 미흡하고 일정 상 다소 무리가 따를 지라도 주어진 여건 속에서 활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은 여러 가지다. 연간 18개에 달하는 경마대회 일정 중 4∼5개를 특정일에 집중 시행함으로써 스스로 축제 분위기를 돋구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야간경마 기간 중 하루를 정해 일일 10개 경주만 편성해 보자. 제1경주 국산 2세 암·수 1400m 쥬비나일 대회, 제3경주 국산 3세 암말 1800m 코리안오크스, 제5경주 국산 3세 암·수 1800m 코리안더비, 제7경주 1군 오픈 1200m(혹은 1400m) 단거리 대회, 제8경주 1군 오픈 2000m(혹은 그 이상) 장거리 대회..그리고 좀 더 욕심을 낸다면, 최근 강세를 보이는 외산개별거래마를 위해 하위군 중거리 대회를 한 개쯤 끼워 넣는 것도 좋다. 이런 식으로 경마일 하루를 온통 경마대회로 꽉 채우는 것이다.
이날은 그야말로 모든 경마인들의 축제가 될 것이다. 경마공원을 찾는 경마팬들은 물론, 경주마를 소유한 마주, 경주에 출전하는 기수와 경주마 관리에 만전을 기했던 조교사, 관리사, 그리고 빡빡한 경마시행 일정이 가능하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움직인 시행체 직원들까지... 이날 만큼은 경마종사자와 경마팬 모두 경마를 매개로 혼연일체될 수 있을 것이다.
마권종류가 여러 가지면 금상첨화겠다. 모든 경마대회의 우승마를 맞히는 중단승식, 각 대회 3위 내 입상마를 연속해서 맞히는 복연승식 등 베팅의 즐거움을 배가시켜주는 장치들은 경주 자체는 물론 관전의 묘미까지 극대화시켜 줄 까메오다.
이날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나면 기수, 조교사, 경마팬 등 모든 경마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도 마련해 주면 좋겠다. 경마대회의 숨은 이야기, 에피소드, 우승 소감, 적중 소감 등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그런 풍경도 가히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선진 경마시행국처럼 경주마 자원이 남아돌고, 2000m를 2분 05초대에 뛰지 못해도 상관없다. 지금의 우리 수준으로도 이런 축제는 얼마든지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경마 분야 뿐 아니라 우리 사회는 축제와 놀이에 대단히 인색하다. 하지만 지난 월드컵에서 보여준 국민적 응원 문화는 그동안 감춰져 왔던 한국민의 정서를 비로소 일깨워 준 계기가 됐다. 이제 경마 시행을 통한 축제 문화가 우리 사회를 파고들어 자리잡는다면 경마산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스스로 제고될 수 있다. 많은 국민들은 도박이 아닌 놀이문화로 경마를 접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럴 경우 경마산업과 그 종사자의 운신의 폭은 더욱 넓어질 수 있다.
사행심 부추기는 도박이라는 멍에를 쓰고 사회의 온갖 편견과 지탄 속에서 멍든 경마산업이 온 국민과 함께 하는 놀이 문화의 중심에 우뚝 서는 날이 오길 바란다.
한국의 브리더즈컵… 실현 가능한 상상임에 틀림없다.


작 성 자 : 이희경 eheek@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