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그랑프리(GⅠ) 우승의 영광은 미국산 5세 수말 ‘밸류플레이’에게 돌아갔다.
12월 19일(일요일) 제9경주 외산 1군 2000m 핸디캡 방식으로 시행된 2004 그랑프리(총상금 3억원, 우승 156,000,000원)는 출전마들의 전력 차이가 미세한데다 핸디캡도 최고 56.0kg, 최저 53.0kg으로 역대 최저 차이였다는 점에서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접전이 예상됐다.
경주 전 전문가들의 우승후보 예측이 완전히 갈린 상태에서 현장 인기도(단승식 기준)는 1번 ‘섭서디’(단승식 3.7배), 8번 ‘템피스트웨스트’(6.0배), 5번 ‘다이와아라지’(6.6배) 순이었다. 마감 후 출전마 11마리 중 단승식 10배 이하의 마필이 7마리나 나오는 좀처럼 보기 힘든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경주가 시작되자 2번 ‘고려방’이 이신영 기수의 매서운 말몰이에 힘입어 선행에 나섰다. 예시장 인터뷰에서 “선행 작전에 승부를 걸겠다”던 이신영 기수의 당찬 발언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선행을 나선 ‘고려방’ 뒤에 1번 ‘섭서디’, 10번 ‘골든아치’, 9번 ‘빗잇두드’ 등이 자리를 잡으며 2코너를 돌아 뒷직선주로에 접어들었다. 여기서 또 한 번 경주흐름이 요동쳤다. 외곽의 ‘골든아치’가 승부수를 띄우며 치고 나온 것, 그러나 ‘고려방’은 더욱 스피드를 내며 추격을 따돌렸고 이 순간 선두권과 추입권 마필들의 명암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3코너, 선두권 마필들엔 큰 변화가 없었으나 추입권에 있던 마필들이 서서히 치고 나왔다. 먼저 스퍼트를 시작한 마필은 4번 ‘스페셜러, 그리고 그 뒤에서 3번 ‘보카플라이어’도 기회를 엿보며 외곽으로 빠져 나왔다.

4코너, ‘고려방’이 여전히 선두를 질주하는 가운데 참고 있던 ‘섭서디’가 외곽으로 치고 나오며 기세를 올렸다. 그리고 그 뒤에 ‘스페셜러’와 ‘보카플라이어’, 그리고 그 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던 6번 ‘밸류플레이’가 외곽에서 탄력을 붙이며 선두권에 따라 붙기 시작했고 우승후보인 8번 ‘템피스트웨스트’ 역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승부처인 직선주로, ‘고려방’이 결승선 250m 전방까지 선두를 이끌었으나 노도와 같이 덮쳐 오는 추입마들을 따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먼저 추격전을 시도한 ‘섭서디’ 역시 더 이상의 걸음이 나오지 않았다. 모든 마필이 일렬횡대로 장관을 이룬 상황에서 최고의 추입력을 선보인 마필은 바로 ‘밸류플레이’였다. 최외곽으로 진로를 잡은 ‘밸류플레이’는 마치 날개를 단 듯 결승선 200m 전방부터 선두로 치고 나왔고 이후 별다른 위협 없이 결승선을 통과했다. 2분 7초8(2000m)의 주파기록보다 2위마를 6마신 차로 따돌렸다는 점이 더욱 놀라운 대승(大勝)이었다
치열한 2위 접전에선 그랑프리 2연패에 도전했던 ‘템피스트웨스트’가 아쉽지만 최선을 다한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고, 일본산 ‘다이와아라지’가 내측추입으로 3/4마신 차 3위, ‘스페셜러’가 1과1/4마신 차이로 4위를 기록했다. 유일한 국산마이자 여성기수의 그랑프리 도전으로 화제를 모았던 ‘고려방’은 5위에 머물렀으나 이신영 기수의 파이팅 넘치는 선행작전은 이 대회 베스트 장면으로 선정해도 좋을 정도로 멋졌다는 칭찬이 넘쳐났다.

2004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한 ‘밸류플레이’는 2002년 ‘보헤미안버틀러’, 2003년 ‘템피스트웨스트’에 이어 당해연도 데뷔한 미국산 개별수입마의 우승전통을 이어갔고, 박대흥 조교사(18조)는 2000년 ‘즐거운파티’에 이어 두 번째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하며 큰 대회에 강한 면모를 과시했다. 또한 ‘밸류플레이’에 기승한 오경환 기수(19기)는 쟁쟁한 선배들과 무서운 후배들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존재를 팬들에게 각인시켰고, 경마대회 첫 우승을 그랑프리에서 차지하며 2004년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한편 ‘밸류플레이’의 우승 이후 각종 경마관련 사이트에는 축하 글보다는 정기용 기수의 6개월 면허정지, 직전 일반경주 4위 참패 등을 거론하며 비판하는 글들이 많아 이채를 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