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일까? 왜 자신은 그녀에게 한번도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 보지도 못하고 그녀가 하자는 대로 끌려만 왔었을까? 왜 그녀의 유혹뿐이었던 그 모든 것들을 뿌리쳐내지도 못했고, 그녀가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의 곁을 떠나가도 그저 떠났나보다 하고 마냥 견뎌내야만 했고, 그녀가 어디에선가 2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날들을 보내고 나서 아무 거리낌도 없이 자신 앞에 다시 모습을 나타내도 마치 밤데이트를 즐기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만난 것처럼 아무 주저함 없이 그녀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 2년이란 시간 동안에 그녀는 무엇을 했을까? 다른 남자는 없었을까? 그녀의 타고난 성품으로 봐서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사기꾼이라는 남자 말고도 얼마든지 다른 남자들과 만나고 헤어지고를 되풀이 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끼면서도 왜 그녀에게 그런 점에 대해 단 한번도 질투심을 내보이거나 증오심을 토해내거나 하지 못한 걸까? 직장동료에서 단 한번의 유혹으로 연인사이가 된 후 일년 채 안되는 만남과 2년씩의 공백기간을 가진 제각기 다른 두 번의 이별을 해야 했던 5년여의 시간들에 대한 공허함에 대해 왜 그저 씁쓸한 미소와 어색한 침묵으로만 참아내고 인내해야 했던 것일까? 손영무는 그런 생각으로 온몸이 터져나갈 듯 아니 온몸이 알 수 없는 힘에 잡아끌려 붕 솟구쳐 올라 저 유리벽을 산산조각내고 유리벽너머로 튕겨나가 경주로 모래바닥 어느 한곳에 내팽개쳐질 것 같은 환상에 젖어든다. "한 번 해봐!" 장길수의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그가 처음으로 경마장으로 데리고 왔던 날, 난장같이 부산스럽고 시끌벅적했던 경마장입구와, 키 작은 사람들이 말에 오른 채 조그만 트랙을 꺼덕꺼덕 돌던 모습과, 관람대 유리벽 한곳의 열린 문을 나섰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경마장의 위용과, 광장에 내려섰을 때 사람들의 함성 때문에 뒤를 돌아보고 관람대의 그 많은 사람들에 경악했던 날들을 떠올린다. 더욱이 경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첫베팅에서 1260배라는 고배당을 적중시키고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또 자신이 베팅 했던 돈이 얼마가 되었는지 조차도 모른 채, 적중시킨 마권을 환급받아오겠다며 가져가서 다시는 자신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장길수를 생각한다. 경마장의 첫날, 그 모든 유혹들을... 손영무는 이혜진의 유혹과 경마의 유혹이 무엇이 비슷하고 또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뭘 그렇게 생각해?" 이혜진이 그런 손영무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묻는 소리에 그는 깊은 생각에서 깨어나며 특유의 버릇처럼 두 눈을 껌벅여 보인다. "나 용서해줄 수 있어?" 그녀가 조심스레 묻는다. 손영무는 다시 두 눈을 껌벅여 보인다. "다시 시작하고 싶어." 그녀는 애써 진심어린 표정을 지어 보인다. 손영무는 대답대신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내가 잘못 했었어. 다시는 자기 곁을 떠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녀의 눈이 다시 촉촉이 젖어든다. 순간 손영무는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심한 현기증을 느낀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녀는 여전히 촉촉이 젖은 눈빛으로 엷은 미소를 짓는다. 아! 저 유혹! 그녀는 또다시 유혹을 하고 있다. 촉촉이 젖은 눈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로 엷은 미소로. 손영무는 갈등한다. 저 유혹을 뿌리칠 수만 있다면. 그러나 손영무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손은 어느새 2년 전보다 더 앙상해진 그녀의 손을 잡는다. 그녀도 그의 손위에 다른 한손을 포개며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난 혜진이를 소설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상류사회의 여자로 살게 해 줄 수 없어." "말했잖아. 그건 꿈이었다고. 그리고 여기서 자길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난 자살했을 거라고." "나 다시는 경마하지 않을 거야." 이혜진이 나직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알아. 나도 다시는 경마 안 해." "그런데 왜 여기서 다시 만나자고 했어?" "자길 다시 만난 곳이니까." 손영무는 신음 같은 긴 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유리벽너머로 고개를 돌린다. 이혜진도 그를 따라 유리벽너머로 시선을 돌린다. 유리벽너머 경주로에선 음악에 맞추어 3경주에 출전할 경주마들이 지나쳐가고 있다. "우리 경마 버리는 대신 마주 할까?" "마주? 마주를 아무나 하나?" 손영무와 이혜진은 흘낏 서로를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손영무의 핸드폰 벨이 울린다. 그가 핸드폰의 폴더를 열자 "니 어데고?" 하는 어머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니 설마 또 말 타러 간 거 아이가?" 손영무는 대답대신 잠시 두 눈을 껌벅인다. "절도 모르고 시주하지 말거라." "아니에요. 저 지금 선보고 있어요." "선? 참말이가?" "예." "그래? 아야! 퍼뜩 온나! 아이다. 찬찬히 온나! 내 기다릴기다!" 손영무는 핸드폰의 폴더를 닫고 흘낏 이혜진을 바라본다. 이혜진이 씽긋 미소를 지어 보인다. "때로는 거짓말도 필요해. 나쁜 일만 아니면..." 손영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데 "거짓말 아니잖아? 선보고 있는 거잖아 지금?" 하더니 "나 자기한테 구혼반지 받고 싶어. 내게 청혼 해 줄래?" 하며 그 앞으로 얼굴을 바싹 갖다대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다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손영무는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그녀의 반짝이는 두 눈을 바라보고 어색하게 미소 짓고는 다시 시선을 유리벽 너머의 경주로로 돌린다. 어느새 3경주에 출전할 경주마들은 경주로를 지나쳐 출발대기소로 옮겨가고 경주로는 텅 비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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