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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말 타러 갔다 오나?" 축 처진 어깨를 하고 현관문을 밀치며 들어서는 손영무를 보고 어머니는 혀를
차며 물었다. 손영무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표정으로 흘낏 어머니를 바라보고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내 다 알아봤다. 니가 토요일하고
일요일마다 말 타러 다니는 기 한마디로 도박하는 기라며?" 어머니가 손영무의 뒤를 따라오며 소리를 높였다. 언젠가처럼 손영무를 붙잡아놓고
한번 따져보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듯 했다. "니 친가고 외가고 우리 집안에 놀음 좋아한 사람 하나도 없었다. 근데 니가 우예
고런데 빠져드나?" 어머니는 아무 대꾸도 없이 문손잡이를 잡아 쥐는 손영무를 밀쳐내며 먼저 방안으로 들어서서 벽스위치를 올렸다. 천정에
매달린 둥근 갓 형광등이 깜빡거리며 어둑하던 방안이 이내 밝아졌다. "아직 청춘이 새파란 아가 변변한 일자리 하나도 없이 빈둥거리는 꼴
보기도 애간장이 타 죽겠는데 놀음하는 거는 또 뭐꼬? 집안 아예 말아묵을라 작정했나?" 어머니의 노기 가득한 목소리를 들으며 느릿한
걸음으로 방안으로 들어서던 손영무는 뻥한 표정으로 굳어진 채로 우뚝 섰다. 방안가득 쌓여있었던 경마예상지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몽땅 쓸어냈다." 어머니는 손영무가 그런 표정을 지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고 있었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손영무는 여전히
뻥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신음 같은 한숨을 토해내고는 눈을 감았다. 어머니는 더욱 기세를 올렸다. "와? 내가 몬 없앨 걸
없앴나?" 손영무는 다시 눈을 뜨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물어보기라도 했어야죠?" "와? 그기 무신 신주단지라도
되나?" 어머니는 다시 소리를 높였다. 손영무는 털썩 주저앉고 싶은 심정을 겨우 가다듬으며 책장과 서랍들을 뒤져나갔다. 그러나 어머니의
몽땅 쓸어냈다는 말이 사실인 듯 어디에서도 경마예상지뿐 아니라 경마에 관한 어떤 흔적조차도 찾아낼 수 없었다. 손영무가 참담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어머니는 다시 혀를 끌끌 찼다. "에미라도 죽었나? 와그리 죽을 쌍이고?" 손영무는 기어이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주저앉는 그의
겨드랑이에서 여태 까지 둘둘 말아 끼우고 있던 내일경마의 경마예상지가 방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것을 보고 어머니가 "내일도 또 갈라꼬 책
또 사왔나?" 하며 비명을 지르듯 다시 소리를 높였다. "말 타는 기 아편중독 같은 기라더니 참말인가 보네?" 손영무는 또
한번 신음 같은 한숨을 토해내며 두 손으로 머리를 마구 긁어댄 후 쥐어짜듯 머리카락들을 움켜쥐고는 무릎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 위로 어머니의
탄식과 하소연과 푸념들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제 풀에 꺾인 어머니가 "내는 이렇게는 몬 산다. 이렇게는 몬 살아..." 하고 도리질을
하며 방을 나가버리고 난 한참동안을 손영무는 머리를 처박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손영무의 내세울 것이라고는 별로 없는 재주 중에 하나가
쪼그려 앉은 채 잠이 들 수 있는 것이었다. 손영무는 무릎에 머리를 처박은 채 미동도 하지 않다가 그 자세로 그냥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손영무는 잠에서 깨어나 여전히 고개를 무릎에 처박은 채 게슴츠레 눈을 떴다. 방의 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손영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몽롱한 시선으로 방구석을 천천히 훑어나갔다. 일년 넘는 날들을 경마날 때마다 주워 모아 와서 밤이 새도록 경주결과를 분석하고 연구하고
기록하고 쌓아두었던 경마예상지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자리들이 자신의 쏴한 가슴 저림처럼 비어져 있었다. 순간 손영무는 이혜진을 생각했다. 아니
이혜진보다 내일의 경마를 생각했다는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오늘경마의 완패로 호주머니에는 돈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내일 경마에 베팅 할
충분한 돈이 있어야 했다. 그 돈은 통장에 예금되어있었다. 필요한 만큼의 돈을 필요한 계좌로 이체를 시키고 저녁 때 되돌려달라며 그 통장의
현금지급카드를 그녀에게 건네주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약속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어쩌면 그녀는 통장에
예금되어있는 돈을 몽땅 다른 곳으로 계좌이체 시켜버리고 언젠가처럼 자신에게서 또다시 달아나버렸는지도 모른다. 통장에는 그런 유혹을 충분히
느낄만한 액수가 예금되어 있으니까. 그렇지만... 설마... 아니겠지. 무슨 사정이 생겼겠지. 혹 만의 하나, 자신에게서 또다시 달아나려 결심을
하게되었다하더라도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 여자라면 통장에 예금되어있는 돈 중에서 그래도 조금은 남겨두었겠지. 손영무는 게슴츠레 한 눈으로 나직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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