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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 VS 꾼 - 제1화 "중독" (16) |
몇몇 사람들이 저마다 밤새 공부를 한 듯 꼬질꼬질 해 보이는 예상지들을 둘둘 말아 겨드랑이에 끼고 걸어오고 있다. 어쩌다 빈손으로 털레털레 오고 있는 사람들에게 길게 늘어선 예상지 가판매원들이 제각각의 예상지들을 흔들어 보인다. 홍성만과 한두 번쯤 눈인사를 나누었던 사람들이 홍성만에게 인사말을 건네기도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한다.
"벌써 가는 거요? 첫 경주 터졌다더니 설마 첫 경주에 다 때려 박은 거 아뇨?"
홍성만은 멋쩍은 미소로 고개를 저어 보이며 그들을 지나쳐간다. 수표환전을 하려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고 있던 여자들 중 하나가 홍성만 앞으로 나선다.
"수표 바꿔드려요?"
홍성만은 다시 고개를 젓는다.
"식사하러 가시는 거예요? 아침 못 드시고 나오셨나보네?"
뒤에 서 있던 다른 여자가 아는 채를 한다. 언젠가 한번 지방수표를 환전했던 여자였다. 홍성만은 여자들에게 다시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장외지점 입구가 들어서있는 건물의 모퉁이를 돌아간다.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늘어서 있다. 정장을 한 남자들과 온갖 맵시를 다 부린 여자들과 말쑥한 차림을 한 노인들이 듬성듬성 무리를 짓고 있고,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주차요원의 수신호와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서 주차장으로 들어갈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1층 벽면 전체가 대형유리벽들로 치장 된 4층 건물은 웨딩 홀이 있는 곳인데 다른 때는 아무 느낌도 없이 무심코 지나쳐갔던 곳이다. 마사랑이라고 불리는 장외지점은 바로 그 건물의 다른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데 웨딩 홀로 출입하는 사람들과 장외지점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마치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처럼 옷차림이나 얼굴 표정들도 판이하게 다르다. 지금 2경주가 시작되기 바로 전이니 11시30분 직전일 것이다. 대부분 12시부터 결혼식을 올릴 텐데 유리벽을 통해 보이는 웨딩 홀 안 로비에는 벌써부터 결혼식을 찾아온 부지런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홍성만은 유리벽 밖에서 한참동안 망연히 유리벽 안을 바라본다. 장외지점의 흡연실 유리벽 밖에서 흡연실 안을 들여다보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풍경이다. 새삼스레 허탈감을 느낀 채 망연히 유리벽 안을 바라보며 서성이던 홍성만은 예식장 출입구 쪽으로 무의식적으로 느릿한 걸음을 옮기다가 한 무리의 사람들 틈에 밀려 웨딩 홀 안으로 들어선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들이 들려온다. 장외지점 안에서 귀에 익숙하게 들어왔던 욕설과 고함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찌푸린 표정을 한 사람들도 없다. 모두가 소곤소곤 속삭이는 듯 하면서도 얼굴에는 하나같이 미소와 즐거움이 가득 찬 표정들이다. 연미복을 차려입고 왼쪽 가슴에 아이보리 색 국화를 꽂은 신랑인 듯 보이는 청년 하나가 입구로 들어서는 한 무리의 축하객들을 맞이하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기도 하고 하얀 장갑을 낀 두 손으로 상대의 손을 잡고 흔들며 함박미소를 지어 보인다. 축하객들은 신랑의 어깨를 두드려주기도 하고 덕담을 던지기도 하며 진심 어린 축하를 해준다. 신랑의 인척처럼 보이는 나이든 사람들도 뒤따라와서 악수를 나누고 인사를 나눈다. 홍성만은 그들을 지나쳐 간다. 한 곳에 경마장의 게시판보다 깔끔한 예식안내판이 걸려있다. 30분마다 매 경주가 열리듯이 1시간 간격으로 결혼식 예정표가 기록되어있고 기수변경명단과 출주취소마 명단처럼 신랑과 신부의 이름들이 줄줄이 적혀있다. 여기 와서도 경마장을 떠올리다니. 홍성만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쓴 미소를 짓고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구석에 늘어선 극장식 의자들이 놓여있는 곳으로 가 한 곳에 앉는다. 커다란 홀을 중심으로 크리스탈 룸, 사파이어 룸, 에머럴드 룸이라고 이름 지어진 제각기 다른 예식 룸의 접수대에서는 축하객들이 벌써부터 축의금을 내기 위해 분주히 봉투들을 내밀고 있다. 접수대의 서랍은 마치 마권구매창구처럼 하객들의 봉투를 덥석덥석 물어들이고 다시는 토해내지를 않는다. 그런데도 접수대로 돈을 내민 사람들의 표정은 마권구매창구 앞에서 온갖 고뇌어린 표정을 짓던 사람들과는 달리 모두 밝아 보인다. 그런 모습들을 바라보며 망연히 앉아있던 홍성만은 이런 풍경 속에 자신이 함께 있다는 사실에 괜스레 어색함을 느낀다. 경마를 알고 난 이후 경마장에 빼앗겨버린 토요일과 일요일에 결혼식장이라는 곳을 찾아본지가 얼마만인가? 결혼식뿐이었나? 동창회도 등산이나 낚시모임도 심지어는 꼭 참석해야했던 리셉션이나 심포지엄도 토요일과 일요일은 피해왔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의 관혼상제와 모임들의 불참석습관은 다른 요일에도 영향을 끼쳐 경마에 빠져든 삼년 넘는 동안 그런 행사들에 얼굴을 내민 경우는 고작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어쩌다 한번 참석한 행사 날에는 반드시 경주결과와 배당들을 확인해보고 자신이 경마에 이길 수 있는 날이었는데 하며 한주 내내 아쉬워했었다. 그러한 나날들이 자신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과 점점 멀어지게 했고 결국 고립된 삶을 자초한 셈이 되게 했었다. 홍성만은 망연한 시선으로 웨딩 홀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바라본다. 모두의 얼굴표정들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하고 활기가 넘쳐 보인다. 순간 그들의 모습들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경마장이나 장외지점에서 보아왔던 사람들의 모습들로 바뀌더니 이내 생기 잃은 표정들과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홍성만은 긴 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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