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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쁜 상황에 빠져서도 자신보다 더 불쌍한 자들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니, 백팔만을 아주 불쌍한 인간으로 만들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하겠다. 허나 백팔만의 장점은 곧 단점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돈을 잃지 않고 그런 위로도 자신에게 하지 않는 게 돈 잃고 자신을 위로하는 것보다 훨씬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식이든 경마든 어느 정도는 승률을 맞춰야 쪼잔하게 나마 승부를 길게 끌고 갈 수 있지, 이런 식으로 하루에 크게 깨져서는 앞날이 어둡다 하겠다. 백팔만은 마음속에 한 줄기 불안감을 안고 당나귀 등 위에서 몸을 앞뒤로 흔들며 쉬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한편 마돈걸은 백팔만을 보내고 뭔가 허전한 마음에 아는 오빠에게 전화해 강남의 와인바에서 한 잔 하기로 했다. 백팔만이 불쌍하긴 했지만 불행이란 제 스스로 불러들이는 법, 마돈걸이 뭘 충고한다고 들을 백팔만도 아니었다. 누가 앞으로 늙은 노총각의 마누라가 될 건지 모르지만 그녀조차 백팔만을 개조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마돈걸은, 백팔만이 쥐꼬리만큼 먹고는 팔고 떠난 주식 ‘칠성데크’에서 계속 수익을 올리고 있었기에 오늘 경마에서 몇 푼 잃은 건 별 타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백팔만은 주식과 경마 양쪽에서 재미를 못 본지 꽤 오래 되었다. 해서 그의 현 재정상태가 건전하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잃은 돈을 만회하려고 조급히 서두르다 점점 더 수렁에 빠져들어 가는 게 초보 베팅꾼들에게 닥치는 일반적인 상황인데 백팔만의 경우 잃은 돈 만회보다는 베팅 자체에 스릴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닌가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남자는 여자에게 대시해도 대시하는 자체에 스릴을 느껴 실제적으로 괄목할만한 성과를 얻어내는 데는 재능이 없다고 보겠다. 변죽만 울린다고 봐야 하나, 해서 마돈걸은 백팔만에게는 미답지의 처녀와 다름없었다.
보면 볼수록 여자에게 동정심을 일으키게 하는 백팔만이지만 결국 여자가 원하는 건 믿음직한 남자라고 할 수 있다. 마돈걸이 지금 만나기로 한 오빠는 믿음하고는 큰 상관이 없지만 여자를 재미있게 하는 데는 소질이 있는 중년 오빠였다. 인생이란 가끔 재미를 느껴야 살만 한 것 아닌가? 열불 터지는 백팔만만 쳐다보며 인생을 허비할 순 없지 않은가 말이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