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 신사(64) - 헤밍웨이 식으로 떠나라

↑	우영창(소설가, 시인)

  돈 내고 영화관에 들어가 로맨스 영화를 한 편 보면, 남녀의 뼈아픈 사연과 애틋한 사랑에 참으로 가슴이 저려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빈약한 체구의 중년 남자가 동네 어귀의 빨간 불빛이 비치는 수상한 카페에서 ‘살찐 뱀’ 같은 중년 마담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허벅지를 맞대고 실없는 소리를 해가며 두 어 시간을 보냈다면, 그걸 카메라로 찍어댔다면 누가 그 필름을 보려 할 것인가? 누가 그 남녀가 가슴 아프다고 눈물지을 것인가? 닭살 돋는다고, 저리 치우지 못하겠냐고, 뭔 화면이 저리 추잡하냐고, 저 눈짓 하며 손짓 하며 저 대사 하며 도대체 관객의 수준을 뭘로 보고 저따위 저급한 화면을 들이대냐고 하지 않겠는가 이 말이다.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당사자인 두 남녀는 애당초 남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쉽게 얘기해서 뵈는 게 없는 남녀였다. 남녀가 단 둘이 있으면 원래 닭살 돋는 말과 몸짓을 주고받는 것이고, 추잡하기는커녕 온갖 게 다 황홀한 느낌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며, 절절한 심정으로 상대의 영혼과 육체를 갈구하게 되는 법이다.
  살찐 뱀과 배삼지 국장은 술값 50여 만 원을 매개로 중대하고 심오한 감정과 느낌을 상호 교환한 바 있고, 이제 다가오는 어버이날에 카페 문을 몰래 열어 두 사람만의 밀회를 갖자는 언약을 하게 되었으니 이 순간의 이별이 결코 인연의 끝이 아님을 알 수 있겠다. 배 국장은  돌아서서, 헤밍웨이가 여자를 남겨두는 방식으로 문까지 똑바로 걸어가서 한 손으로 문을 박차듯이 밀고 나갔다. 그때까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음은, 배삼지 국장이 대한민국 남성들의 기개를 드높이고 위엄을 사방에 떨친 쾌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거나 살짝 뒤돌아보거나 걸어가면서 한숨 내지는 신음을 냈다면, 마지막 순간에 곧장 문을 밀고 나가지 않았다면, 문이 그 진동으로 떨면서 멈출 때에는 이미 십 리 밖까지 가지 않았더라면, 마담 살찐 뱀에게 그토록 가슴 저며 오는 여운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여인의 가슴에 불을 지르려면  여인의 가슴이 제 스스로 타들어가도록 일시 방치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배삼지 국장은 자신도 모르게 중요한 작업을 마지막에 하게 된 것이다. 여인은 손아귀에 쥔 50만 원의 무게도 잠시 잊고 허허롭게 사라져가던 사내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빨리 가 주었으면 했던 사내가 생각이 지워지기도 전에 가버렸으니 가면서 어떤 감동을 남겼으니, 여인은 사내를 생각한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하는 감회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의 빈약한 체구와 어눌한 말투와 팀으로 30만 원을 내놓는 혼미한 행위가 어떤 존엄을 갖춘 거 같기도 하고 결코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심지어 성적 매력까지 갑자기 풍겨와 ‘살찐 뱀’은 정서적 충격 속에서 그만 방황하는 영혼이 되었 다. 살찐 뱀은 어버이날에 사내를 만나야 하는, 다가오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