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 신사(111) - 일이 진행되려면

↑	우영창(소설가, 시인)

40대의 선글라스를 윗주머니에 꽂은 사내가 `동영상에도 잘 어울릴 것 같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고 고대해에게 말했을 때 고대해는 동영상이 영화, 드라마, 광고 그런 걸 의미한다는 걸 캐치하고 있었지만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담담하게 사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모델로서 모 남성잡지의 화보 12면을 책임지고 있는 주요 모델이자 저명 사진작가의 피사체로서 품위를 깨지 않고 할 수 있는 대응이었다. 사내는 고대해가 호들갑을 떨지도, 크게 흥분하지도, 쩔쩔매지도 않고 부처의 제자처럼 담담하게 나오자 담대한 여인이라는, 자신의 애초 판단이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쯤에서 사내는 명함을 꺼내 사진작가에게 먼저 건넸다. 이러한 것은 오직 프로만이 할 수 있는 행위로 아마추어는 감히 상상도 못할 예의 바른 행위였다. 즉 먼저 이 여자와 함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사진작가에게 경의를 표하며, 결코 당신의 영역을 침범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동종업계의 한 분파의 일원으로서 관심을 표명한 것이다, 그러니 이 여자와 잠시 대화를 할 수 있는 무언의 허락을 내려다오 대충 이런 뜻이었다. 사내가 이렇게 예의바르고 경우 있게 나오는 이상 사진작가도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작가가 `아, 네." 하자 40대 사내는 명함을 또 그 사진작가에게 건넨 바, 너는 스틸 나는 동영상 이것은 신구 대립 또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첨예한 구분만은 아니다, 우린 서로의 영역이 있다, 그건 존중한다, 그러나 이 여자는 정적인 면만으로 가두기엔 훨씬 다이너믹하지 않은가, 그대가 놓치고 또는 버려두고 있는 부분을 내가 동영상으로 채워나가며 우리가 상생하는 안을 강구해보자, 뭐 대충 이런 뜻이었다.
  "잠깐 모델과 대화를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자 사진작가는 어서 하시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 자가 이런 사전 양해 작업 없이 바로 피사체와 대화를 나누고자 했다면 남의 떡에 침을 묻히는 무도한 자라는 평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아름다운 풍속이 급격히 사라져가고 있고 어째서 그러한 절차가 미풍양속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가겠다고 뛰고 있는 점을 볼 때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큰 행위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이어서 동영상 사내는 고대해에게  "동영상도 스틸의 깊이를 확보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하고 철학에 버금가는 대사를 잽처럼 던졌다. 고대해는 하품을 할 수는 없고 `동감이에요` 하고 짧게 대답했다. 일이 진행되려면 이렇게 맞장구를 쳐줘야 한다. 내용이 있건 없건 간에 말이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