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 신사(108) - 피사체를 바라보며

↑	우영창(소설가, 시인)

  "많이 기다리셨죠?" 하고 사진작가가 물었을 때 "산책하고 있었어요." 하고 고대해가 대답한 것은 기다렸다, 아니다 하는 대답보다 훨씬 유쾌하고 격조 있는 답변이었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러한 대답에 마음이 움직인 사진작가는 고대해를 세워놓고 바로 사진 작업에 들어가기보다 `함께 좀 더 산책하지 않겠냐는` 제의를 하였다. 그 제의는 경우에 합당하지 않았으므로 고대해는 응하지 않았다. 고대해는 사진작가가 늦게 온 것은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었으나 경우에 맞지 않게 산책 운운한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굳이 좀 더 걷지 못할 것은 없었으나 포토 장소를 찾는 것도 아니고 남자 여자로서 보조를 맞춰가며 궁을 한 바퀴 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늦었는데 작업 들어가시죠." 고대해는 바로 사진작가가 해야 할 일을 지적하고 건의하였다. 결코 기분 나쁘게 들릴 만한 말은 아니었다.  `산책은 무슨 말라비틀어질 산책` 평소의 고대해 성질 같으면 그렇게 내뱉을 만 했으나 장소가 장소이고 명색이 그래도 사진작가이며 여체의 예술화를 시도하는 자라 그 정도로 하여 두었다. 사진작가는 심성이 여리고 말을 잘 알아듣는 자이기에 즉각 고개를 끄덕이고 고대해를 사진이 잘 받는 어느 나무 밑으로 안내하였다. 그녀의 뒤에는 연꽃이 떠 있는 천년 호수가 오래된 물빛을 일렁이며 누워 있었다. 디카도 스마트폰도 아닌 묵직한 수제 카메라가 등장하여 고대해를 피사체로 잡기 시작하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비켜서서 곁눈질을 하며 피사체의 얼굴 표정과 동작 등을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고대해의 모습, 우람할 것까진 없어도 근육질의 어깨와 팔 다리, 압도하는 듯한 눈빛, 적당히 그을린 피부, 신중한 동작 등에서 일반 여성모델과는 완전히 다른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그녀를 산악인 여성 씨름단 주장, 비치볼 심판, 도 대표 조정 선수, 아니면 재개발 지대의 사나운 아줌마 담당 용역인 정도로 생각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저러한 모양새의 여성이 어떻게 하여 피사체가 되어 어디에 어떤 용도로 그 사진이 제공될지 많이 의문스러웠던 것이다. 이효리나 전지현이나 아니면 소녀시대나 카라나 뭐 그러한 여성상에 익숙해져 있는 일반인에게 이러한 새로운 전형의 여성상은 혼동스런 느낌과 함께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듯한 서스펜스까지 느끼게 했던 것이다.
"잠깐만, 네. 고개를 왼쪽으로, 오른 팔을 자연스럽게 내리시고 ... 그렇죠... 아니.. 아 그게 아니고...." 작가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피사체에게 설명을 하고 있는 걸 사람들은 듣고 있었고 피사체는 그다지 급하지 않은 동작으로 모습을 수정해가고 있었다. 모델이란 언제나 약간은 신비스러운 법이다. 그러한 신비한 그녀를 아까부터 쭈욱 주시하는 남자가 있었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