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 신사(107) - 산책하고 있었어요

↑	우영창(소설가, 시인)

  고대해에게 `이것도 인연인데 차나 한 잔 하자`고 했다가 `누구시냐`는 말을 듣고 이런 사람이라고 `월드 영상문화원 마케팅 이사`라고 적인 명함을 건넸다가, 그 명함이 고대해의 손가락 사이에서 떨어져 지상으로 낙엽처럼 팔락이며 떨어지는 장면을 목도한 사나이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마치 옛남자처럼 그렇게 서 있고 고대해는 자기 갈 길을- 갈 길이란 그냥 길로 공원의 산책로를 말하는 것이지만-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해가 `차나 한 잔`에 쉽게 응할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과 명함의 직책에 좌우되는 여성이 아니라는 점과 명함을 버림으로써 야기될 문제에 크게 연연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대해는 천천히 공원을 산책하며 약속장소와 약속시간을 정한 사진작가가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사실에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사진작가에게 의뢰를 한 남성잡지가 고대해에게서 바라는 것이 남성의 로망을 채워줄 강력한 여전사 이미지임을 알고 았는 고대해는 그 이미지를 사수하기 위해서라도 약속시간 따위에 조바심치며 남자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헐레벌떡 달려오든 여유있게 웃으며 손 흔들고 오든 오긴 올 것이로되, 만약 오지 않는다면 당일 모델료는 계약을 위반한 사진작가가 챙겨줘야 할 것으로 보고 주거래은행 계좌 잔고를 확인해볼 작정이었다. 만약 일방적으로 약속을 어기고 계좌송금도 하지 않는다면 그를 죽이거나 죽어가게 할 참이었다. 죽이지는 않더라도 무사히 살아가게 할 생각은 없었다. 뭐 딴 여자에게도 그런 짓을 할까봐 예방차원에서 한다거나 사회정의와 신의의 법칙에 위반되기에 징벌한다거나 그런 차원이 아니라, 기분이 나쁘기 때문에 놈으로 하여금 돈을 굳히게 할 수는 없기에 즉각 쩐을 받아낼 예정이었다. 그러한 생각(놈이 빨리 왔으면 결코 하지 않았을)을 잠시 하고 있는데, 그 자가 과연, 사진기를 어깨에 두른 자가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것이었다. 뛰는 것도 아니고 걷는 것도 아니고 경보 동작으로 오는데 뭐 마려운 자가 목적지를눈앞에 두고 사력을 다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 점이 애처롭기도 하고 일견 갸륵하기도  해서 조용히 멈춰 선 채로 작자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약간 미간을 찌푸린 채.
  "많이... 많이 기다리셨죠?" 사진 작자는 더듬으며 말을 건네왔다. "산책하고 있었어요." 많이 기다렸다 아니다 이런 대답대신 이 얼마나 유쾌하고 재미있는 대답인가? 사진작자는 이 여전사가 다소의 여유와 유머를 갖고 있음에 남몰래 안도하고 깊은 감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어쩜 불순할 수도 있는.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