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 신사(121) - 에이 코스로 해요

↑	우영창(소설가, 시인)

40대 동영상 제작자가 고대해 모델에게, 한정식집에 마주 보고 앉아 어서 메뉴판을 열어보시라고 함에 따라 고대해는 은박 입힌 그 육중한 메뉴판을 좌우로 활짝 열어젖혔다. 웬만한 여성이면 심장이 떨려 조심조심 열어보며 가격을 훔쳐보았을 터인데, 그리고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빛이 되었을 터인데, 우리의 고대해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은박 메뉴판을 활짝 열어젖혔을 뿐 아니라 메뉴의 내용까지 사시눈으로 거만하게 훑어보았던 것이다. 보통 여성이면 매우 공손한 태도로, 또는 내심을 들키지 않으려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태연한 척 하며 메뉴판을 읽어 내려갔을 터인데, 이 생긴 것도 당당한 육체에 압도하는 듯한 눈빛과 강인한 전사의 얼굴을 한 30대 여성이 이 집의 권위에 도전하는 듯 거만하게 메뉴판을 훑어내려 갈 때 종업원인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식당 전체가 위협을 느끼는 걸 알 수 있었다.
"에이 코스가 괜찮아요. 비나 시는 대식가들이나 먹는 거고요. 한 번 보세요." 하고 고대해가 남자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남자는 메뉴판을 받아서 값 쪽으론 눈길을 주지 않는 척 했으나 실은 내용이고 뭐고 얼른 값부터 살펴보았다. 남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35, 45, 55, 95 였다. 물론 뒤에 동그라미가 세 개 더 있었다. 이것은 부부가 먹기엔, 오래된 연인이 먹기엔 비싼 거지만 첨 보는 남녀가 먹기엔 과하다 할 수는 없는 수준이었다. 특히 에이 코스는 일반 뷔페 수준이었다. 이러한 곳에서 꼭 갖다 붙여 놓는 부가세라는 것은 붙어 있지 않았다. 이 말은 부가세는 음식값에 포함되어 있다는 거였다. 고급식당일수록 부가세는 떡하니 어서 보시라는 듯 붙어 있었다.
호텔에 가서 커피를 시키면 웬만한 데는 1만 5천원이 넘어가는데 거기에 부가세까지 붙어나오는 것이다. 물론 호텔 문만 열고 나가면 길거리에 휩쓸려가는 보통사람이거늘 호텔 커피숍- 일반 커피숍보다 바닥 청소가 잘 되어 있고, 티 테이블에 서류 따위를 펼쳐놓은 늙은이들이 많이 있고, 종업원들이 남녀 공히 제복을 입고 있고, 외국인들이 드문드문 섞여 있고 뭐 그런 차이 정도- 이 웬 말인가. 그래서 커피값이 아까워 대추나나 인삼차를 시키게 되는데 이것들은 좀 달다고 볼 수 있다. 아무래도 나이든 어른신들이 많이 다니는 것이다. 아무튼 부가세도 없는 차칸 메뉴를 들여다 본 남자는 적잖이 안심하고 미소를 지으며 "그래도 에이는 좀, 비코스로 하시죠." 하고 금방 주문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냥 에이로 해요." 고대해는 목소리를 깔면서 말했다. 함부로 대꾸할 만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