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해가 한정식을 추천하고 40대의 동영상 제작자가 이를 받아들여 저녁메뉴는 이 근처에서 꽤 잘 나간다는 한정식으로 결정이 났다. 남녀가 함께 음식을 택할 때 그 주도권은 과거엔 남자가 주로 쥐고 있었으나 차차 여성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게 추세다. 특히 가정주부의 경우 외식 시 남편에게 형식적으로 뭐 먹을까 하고 묻긴 하나, 엄밀히 따져보면 뭘 먹고 싶냐가 아니라 자신이 뭘 먹으면 좋겠느냐는 가벼운 물음의 형식을 띠고 있다 하겠다. 이럴 때 눈치 없이 족발이니 순두부찌개니 해가며 의견을 내봤자, 결론이 이미 나 있는 경우가 많아서 아내는 남편의 의견을 가볍게 묵살하고 그럼 오늘은 오랜만에 피자로 하지 뭐하고 결론을 내리고 마는 것이다. 특히 자녀들이 동행할 경우 어미와 자식 간에 이미 입맛을 찾아 결론을 내놓고는, 남편은 지갑만 들고 줄래줄래 따라오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남편도 두 말 않고 서양 빈대떡을 먹으며 맥주 한 병을 시키고 식당 안에서 틀어주는 스포츠 중계를 넋 놓고 보는 것이다. 그것도 누군가가 `런닝 맨 하는데` `나가수 하는데` `넝쿨째 하는데` 하면 그만 채널이 휙 돌아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우리의 가정은 대저 이러한 범주에서 운영되고 또 흘러가는데, 고대해와 동영상 제작자처럼 첨 보는 남녀의 경우에도 여성이 먼저 제의를 해오는 경우가 있다. 이때엔 그 여성은 의사를 분명히 밝히는 상당히 적극적인 여성으로 비교적 좋게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이 그 잘한다는 식당으로 들어서자 보랏빛 개량 한복을 입은 여성이 입구에서부터 마치 막아서듯 나서서 예약을 하셨냐고 다그쳐왔다. 보통 집이 아닌데 어떻게 알고 왔냐? 예약을 안 하고도 그러고도 먹을 생각을 하냐, 그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남자가 다소 당황하였으나 고대해는 준비한 말처럼 "미처 못했네요. 자리가 있나 한 번 봐 주실래요?" 하고 보기 드물게 상냥한 목소리로 문의하였다. 고대해가 마치 귀부인처럼 말하자 여종업원도 이에 상응하는 목소리로 "자리가 있나 한 번 봐드릴게요. 가끔 예약 취소가 있긴 한데." 하며 물러섰다. 이는 곧 자리가 있단 얘기였다. 어느 식당이나 예비로 일정 좌석을 확보하고 있는데 갑자기 들이닥치는 정재계 또는 법조계 때론 문화연예계나 전국구 스포츠 스타를 맞이하기 위해서, 아니면 건물주나 한량들을 모시기 위해 좌석을 다소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마침내 들어오시라는 말씀과 함께 그들은 제법 몫이 좋은 곳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곧 은박 입힌 메뉴판이 들어왔고 남자는 그걸 들여다보기 전에 먼저 고대해에게 열어볼 것을 눈짓으로 청하였다. 고대해는 육중한 그것을 철문을 열듯 열었다. 그리고 메뉴를 들여다보았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