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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고대해가 담담하게 나오자 입맛을 다시면서도 일단 한 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야 어차피 마시게 되어 있는 거, `조용한 데로...` 하며 강권하다시피 또는 애원하다시피 다시 말을 꺼낼 수도 있지만 구차할 뿐더러 `차나 마저 마시라니까` 같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다. 이제 어떤 얘기를 꺼내 분위기를 슬슬 반전시킬까 이런 생각을 사내가 하는 것 같았는데 고대해는 아무 거나 얘기해 봐라 하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간에 말 안 하기 시합을 벌인다면 분명 고대해가 이길 것이었다. 고대해는 말을 많이 안 해도 살아갈 수 있는 여자로 보였다. 사실 말 안 하고 산다는 건, 특히 여성의 경우는 징역형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눈 뜨고 잠들 때까지 오직 말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얘기를 해야 행복해지고, 말을 많이 해 입이 아프면 음식으로 또 그 입을 행복하게 해줘야 하고,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을 보며 차라리 입을 크게 벌일지언정 결코 다물지는 않겠다는 각오의 여성들이 별 다른 이유 없이 말을 안 하고 지내야 한다면 시위를 넘어 모든 것을 때려부수려 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침묵은 자고로 여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며, 이십세기가 시작되기 전에는 `보고파요` `외로워요` 이런 말은 해도 고독하다느니, 자야의 텅빈 공간을 느낀다느니 실존의 위태로움을 느낀다느니 하는 이상한 소리는 하지 않는 게 올바른 자세였다. 헌데 요즘은 사내들이 외롭다 하고 여성들은 고독하다는 등 단어 선택이 혼미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아무튼 40대 사내는 마침내 `혹시 써니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하고 입을 열었다. 자신의 전공 분야이자 아줌마들의 로망인 영화 얘기로 이어가자 이거였다. 그래서 그 유명한 써니 라는, 칠공주 같은 여자들이 나오는 영화 얘기를 꺼내 본 것이다. 헌데 고대해의 반응은 아무것도 없었다. `속눈썹 하나 떨지 않고 써니 텐을 말하는 거냐는 듯한 눈으로 멀뚱히 사내를 보는 것이었다. 써니를 안 봤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건 정신을 어딘가 다른 데 놓고 다니는 여자가 분명하다, 남자는 이런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아.... 안 보셨군요." 결코 나무라는 투는 아니었지만 결코 상식적인 것은 아니다 라는 항의 같은 원망이 슬쩍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이 여잔 문예영화를 주로 보는 타입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하는 듯 했다. "저기요." 사내는 계집처럼 또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