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동영상 제작자가 국립공원 앞 찻집에서 고대해와 함께 한 시간도 어언 두 시간이 지나가, 거리에 어스름이 깔리고, 두 사람은 모든 할 말을 마친 사람처럼 잠시 침묵에 빠져 있었다. 이 차 한 잔을 마시고 저녁이나 하며 저녁에 반주나 곁들이며 차근차근 얘기를 풀어나가고자 했던 사내는, `차나 마저 마시라`는 어쩜 모욕적인 발언을 고대해에게서 들은 이후론 상당히 풀이 죽어 말까지 더듬거리며 별 중요하지 않은 얘기만 간간이 끌어가다 그만 우물 같은 침묵 속에 갇혀 버렸다. 때가 되면 저녁을 먹고 술도 한 잔 걸치며 살아온 세월 이 얼마인가. 그 세월 속에 함께한 여인은 또 얼마인가? 그 세월 속에 누구는 동영상으로 바로 데뷔하기도 하였는데, 비록 지상파는 아니지만 케이블 재연배우로서의 화려한 출발을 보장하지 않았던가. 은혜도 모르는 것들이 태반이어, 얼굴만 한 번 뜨면 인기배우가 된 것처럼 몸값을 높이려 드는 것들 때문에 어이가 없고 속도 적잖이 상했다. 아침 드라마의 매장 종업원(종업원은 대개 주인공이다)은 아니어도 매장 주인역할이라도 할 수 없나, 주인공 직장 상사의 여편네 역할(집들이 때만 나온다)이라도 할 수 없냐고 하며 각종 선물 공세에 때론 자신 전체를 내맡기는 형태를 취하기도 하였으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한 번 취한 여인을 또다시 취하여, 상대적으로 다른 여성을 취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날려보내는 우를 범하지는 않아 왔던 것이다. 그러한 사내가 아직 입문도 하지 않은 여인 고대해로부터 지극히 냉담한 어찌 보면 담담한 처우를 받고 얘기를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한 채 쓰라린 가슴을 안고 돌아가야 할 지경에 이르러 있는 게 작금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사내는 누구인가. 동영상 프로덕션이란 그냥 단 이름이 아니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뭇여성의 외면과 내면의 섬세한 움직임을 포착하는데 뛰어난 심미안을 가진, 중후한 직책의 사내였다. 그런 그가 고대해가 아무리 특별한 여성이라 할지라도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늘의 오점이 평생의 짐이 되어 그를 괴롭히며 따라다닐 것이 분명했다. `100번 찍어 안 넘어갈 나무가 어디 있으랴` 그렇다고 그런 무식한 방법을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형편에 맞춰 좀 더 세련되고 우아하게, 격조 있는 방안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그럼 제가 시간도 많이 뺏은 것 같기도 하고, 해서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하고 바로 나온 것이다. 이 말에는 하나의 하자도 없었다. 여기엔 바로 `내 차가 적어도 당신이 타고 갈만한 차이다.` 라는 묵언이 깔려 있었다. `궁금하지 않냐? 어떤 차인지` 하는.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