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 신사(117) - 경영, 대표이사, 남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때

↑	우영창(소설가, 시인)

40대의 영상전문가와 떠오르는 모델 고대해가 찻잔을 앞에 놓고 앉아 있은 지가 말 그대로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사내가 ‘어디 조용한 곳’을 제의하였으나 고대해는 차나 마시라고 담담하게 응대했다. 어스름이 깔려오기 직전의 도심의 거리는 약간의 기대와 흥분을 안고 술렁이건만 두 사람 사이엔 서늘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40대 사내는 남자가 아무 조건 없이 또 하나의 미끼도 없이 여자를 유혹하는 건 쉽지 않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해서 나중에 극적으로 말하려고 했던, 즉 제의라고 할 만 한 것을 좀 일찍 꺼내놓기로 하였다. 사내는 여자가 속으로 잔뜩 기대하다가 실망할 즈음, 거짓말처럼 환상의 제의를 하여 여자를 감격케 하는 데에 적지 않은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고대해라는 여자를 상대로 그러한 공식이 잘 먹혀드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차라리 복선 없이, 처음부터 까놓고 이야기를 해서 선택의 폭을 넓히게 하는 게 옳다면 옳은 길이었다. “저는 사실 프로덕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상제조 배급 유통, 에 그리고 공동제작 뭐 이런 일을 주로 하고 있어요.” 여기서 사내는 ‘사실’ 이란 말을 중요시 했다. 아닌 척, 별 볼일 없는 남자처럼, 시시한 수작이나 부리는 놈처럼 이러고 앉아 있었지만, 실없는 소리도 하고 있었지만, 실은 내가 어엿한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책임감 있고 뭔가 있는 남자다. 끝까지 밝히려 하지 않았지만 이젠 밝혀야 할 때가 왔다. 밝히는 게 속 시원하다. 뭐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렇게 말해놓고 나서 사내는 이제 공은 당신에게 넘어갔다. 당신이 말해보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대해는 “아, 네. 프로덕션요?” 하고 대꾸했다. 그것은 물음표의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알다시피 묻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시냐, 잘 알겠다. 알겠다고, 이것에 가까웠다. 사내는 이에 아랑곳 않고 “네 프로덕션인데 제가 대표 명함을 새겨 갖고 다닙니다. 주주가 저 외에 두어 사람 있지만 경영엔 참가 하지 않고 있지요.” 하고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내뱉었다. 경영, 대표이사, 이런 말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은 상당한 것으로 그것은 곧, 돈, 해외여행, 명품, 고급 레스토랑 이런 단어로 연결되게 되어 있었다. 고대해도 여성인 이상 그러한 단어에 즉각 접속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접속되었다 하더라도 감전된 것처럼 벌벌 떨거나 황홀경에 빠져 있지 않고 또 도덕재무장회원처럼 깜짝 놀란 듯 나서지도 않고. 잠시 침묵 후 소리없이 원 상태로 돌아가, 사내가 전혀 말을 걸어오지 않은 것처럼 멀쩡하게 앉아 있었다. 사내는 아연 긴장하기 시작했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