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 신사(139) - 쓴 맛 나네요

↑	우영창(소설가, 시인)

‘월광 소나타’라는 클래식하고 몽환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와인바로 남자가 고대해를 안내해, 엔틱한 테이블에 그들이 앉았을 때, 앉아서 와인의 선택권을 고대해에게 줬을 때, 그때그녀는 와인 이름 대신 ‘쓴 맛 나는 와인’이라고만 말했다. 이 말에 남자가 놀란 건 모든 와인은 쓴 맛이 나기 때문이 아니라, ‘쓴 맛 나는 와인’이라는 제목이 마치 따로 있다는 것처럼 당당하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 주문을 받은 주인장 같은 아저씨는 “쓴 맛이 좀 강한 와인을 찾으시는군요.” 하고 되받아 말했다. 단맛 나는 와인, 떫은 맛 나는 와인 같은 주문을 꽤 받아본 듯한 말투였다. 아마 사내들은 최음제 같은 와인을 주문했을 지도 모르는 바였다. 남자 또한 와인에 대해서 그다지 해박하다고 할 수 없었으므로, 쓴 맛 나는 와인이라며 주인장이 뭐라고 얘기하는 데 그 이름에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그러한 뭐라고 써 붙인 와인이 왔고, 주인장이 맛보라고 조금 따라준 와인을 음미해보고는 남자는 또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인장이 고대해에게 시선을 돌려 숙녀는 어떠하시냐고 문의하는 표정을 지었을 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만족한다는 웃음을 머금는 대신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이에 주인장은 크게 당황하여 “맛이....” 하고 조심스럽게 문의하였고, 그제야 고대해는 “쓴 맛 나네요.” 하고 주문한 와인이 정확하게 배달되었음을 입증해 주었다. 고대해는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와인이라는 걸 처음 마셔본 시절을 회상하고 그 날의 앳된 모습의 자신을 잠시 떠올렸던 것이다. 그날 와인을 사준 남자는 지금 어디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잠시 했던 것이다.
달빛처럼 안개처럼 깔리던 샹송이 두어 곡 끝나자 조용히 정적이 찾아오더니 앞쪽의 자그마한 무대에 여자 가수가 기타를 들고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유명가수는 아니었으나 실력파임을 입증하듯 인생의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한 노래를 잔잔하게 읊었다. 고대해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듯한 노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남자도 가사의 내용 따위는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다만 이러한 음악을 배경으로 마주 앉은 여자에게 자신이 매우 진지한 사람이며 어떤 책임감까지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속셈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다 낭만적이기까지 하다는 인상을 주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음악이 흐르며 뭔가가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