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 신사(146) - 어디 가나 먹물 냄새 나는 자들이 있다.

↑	우영창(소설가, 시인)

처음 만난 남녀가 저녁을 하고, 음악을 들으며 와인을 함께 나누고 그리고 휘영청 달이 떠 있는 거리를 나란히 걸어 내려오고 있다. 이때 ‘집까지 바라다 드리겠다’고 남자가 말하는 건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남자가 직접 차를 몰아 여자를 바라다 주지 대리를 불러 뒷좌석에 나란히 타고 가는 광경은 좀체 없다. 누군가 시민의식이 투철한 스텝이 ‘둘 다 술을 마셨는데 남자가 운전을 하고 가면 어떡합니까?’ 하고 물으면 감독은 ‘그럼 대리 부르랴?’ 하고 ‘남자가 와인을 쭉 들이켜는 장면, 그거 빼버려. 입만 살짝 대는 장면 그건 살리고.’ 이런 식으로 편집지시를 내리게 될 공산이 크다. 즉 영화에서는 대리가 모는 차에서 남녀가 첫 데이트를 하고 있다는 설정이 어딘가 너무 현실 냄새가 나는 것이다. 물론 해마다 깐느에 가는 모 감독이라면 대리 장면을 그대로 쓸 거고 대리를 여자로 하냐 남자로 하냐 등의 결정만 내리면 될 거였다. 그러나 그건 그의 스타일이지, 아무 감독이나 그렇게 한다고 영화가 제대로 되지는 않는다.
아무튼 우리의 남자는 대리를 불렀고, 차까지 걸어간 지 10분 후 그러니까 그들이 차 앞에 도착한 지 정확하게 2분 후 어디서 숨어 있다 나타난 듯 양복 입은 중년 기사가 눈앞에 나타났다. 마치 차종을 알고 왔다는 듯 세련된 양복을 입은 기사는 한눈에 범상치 않은 인상을 풍겼는데 풍채가 좋다기보다 사무직에서 오래 근무한 자의 먹물냄새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은 어디 가나 이렇게 먹물 냄새 나는 이들이 사회의 각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었다. 아파트를 나서면 경비실에 앉아있고, 등산을 가면 입구에서 관리 제복을 입고 나타나는가 하면, 택시를 타면 운전석에 앉아 있고, 마트에 가면 카트 옆에 서 있고, 복권 판매소라든가 햄버거 주방에서 나타나는가 하면 심지어 재능기부를 하겠다며 동사무소에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런 자들 중의 하나가 차를 대리로 몰겠다며 나타 난 것이다.
이 자는 마치 Bmw를 오래 전에 몰아본 사람처럼, 운전석 쪽 기계들을 일별하더니 바로 기어를 넣고 차를 출발시켰다. ‘오랜만에 몰아보는구만. 팔아먹은지 꽤 되는데’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웬만한 자면 차에 벌써 주눅이 들어 황송하다는 듯 주인의 눈치를 봐가며 조심조심 몰 터인데, ‘계집을 태웠으면 즐겁게 얘기하면서 가라. 운전은 신경’쓰지 말고.‘ 그런 충고를 이미 한 듯한 얼굴로 차를 스무스하게 몰고 있는 것이다. 남자는 특별히 주문한 사람을 자신이 준비해 뒀다는 듯 고대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느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대해는 살짝 얼굴을 돌리고 조그맣게 하품을 하였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