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소설 - 하이힐

하이힐†                                                                        박 인

  스토리의 뼈대를 만들기로 작정하자 무작정 세바스찬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뼈는커녕 살아있는 내 살에 대한 감각조차 무뎌졌을 무렵이었다. 뼈 없는 고기 덩어리처럼 누워 빈둥거리다가 페이스 북을 뒤졌다. 내가 찾아낸 것은, 과거에 사랑했던 아니 지금도 사랑하는 여자들을 위한, 한 조각가의 하이힐을 모티브로 삼은 조각품 전시에 관한 기사였다. 여자와 하이힐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나는 잠깐 생각했다. 말하자면 하이힐은 페르시아 기병들이 말을 타고 전투할 때 신었던 신발이었다. 말의 등자에 하이힐 신은 발을 고정시켜 자세를 안정시킨 용맹한 기사들은 적에게 활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키 작은 루이 14세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신었던 남성적이자 비실용적인 하이힐의 상징성보다 내 두개골 속을 떠도는 것은 살과 섹스였다. 아름답고 도발적이며 섹시한 여자의 긴 종아리뼈와 살. 여자와 하이힐. 한때 불붙었던 열정은 사랑으로 기억되고 흘러간 사랑은 상처로 남을 것이었다. 옛 애인들을 떠올릴 때, 첫 키스와 섹스보다는 갈등이나 상처가 떠올라 그 기억들을 지우고 싶었다.
  세바스찬 에라즈. 그는 칠레 출신 조각가였다. 그의 이메일 주소로 나는 즉각 편지를 보냈다. 순전히 하이힐에 대한 직업적 관심 때문이었다.

  세바스찬에게.
  화가이자 소설가인 나는 당신이 만든 열두 개 하이힐에 관한 기사를 읽고 그것을 바탕삼아 이야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당신이 조각한 신발을 신은 여자들 이미지에 나는 살을 붙이고 싶습니다. 조각과 소설의 합작이라고 해야 할까요. 당신의 조각품은 내게 하이힐을 신은  여자들을 상상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한 달에 한 켤레씩 열두 명 여자들 이야기를 쓸 작정입니다. 마이애미에서 열린 이번 전시회를 축하합니다. 그럼 이만 행운을 빌면서.

  사실 나는 대학에서 족부의학을 전공한 터라 하이힐의 불편함을 잘 알고 있었다. 하이힐을 신으면 전족부가 발목 아래로 늘여나 꺽고 몸 하중은 발볼 아래 중족골두로 몰리게 된다. 발은 변형을 일으키고 이어 통증이 일어난다. 하이힐의 병리적 존재감만 생각하면 애초에 이런 이야기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내 작업의 의미를 살리자면 세바스찬이 겪은 사랑에 관한 추억들을 나는 불러내야했다. 그가 만든 골격에 살을 붙여야 했다.
하이힐에 얽힌 세바스찬의 열두 명 애인들과 나의 소설이 만나도록 하겠다는 말이다. 아직도 음지에 깔린 미완성 사랑들을 위해서, 또는 죽는 날까지 이루어지지 않을 것들에 대한 연민을 품고서 말이다.

작 성 자 : 권순옥 margo@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