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윤 한 로

야자 끝난 학교 내리막 길
긴 얼굴에 커다란 꼰대 양복
나 이제 번뜩이는 재치도 기억력도
화려한 말빨, 수수한 외모도
다 죽었구나
오로지 겸손함만 남았는가
으스스 가을 바람 한줄기
찔끔, 가랭이 속으로 깃들곤
사닥다리 쓰러진 모과나무 꼭대기
오늘따라 똥볼처럼 뜬 달
아, 밤하늘 가득 찌그러져
청동 얼룩 흐르는 달
내 그만 헐랭이처럼 선 채
붉게, 검붉게 그슬린다
시니 공부니 학교니 다 싫여라
내일 당장
애나 보고
시골 들판 새나 쫓았으면


시작 메모
가을 밤 학교를 빠져나오면서 둥그렇게 솟은 달을 본다. 왈칵 떠오르는 갖가지 옛날 생각에다 자꾸 나이만 먹는 나 자신의 추함과 연약함 때문에 서글프다. 세상에서 두려워 할 일은 요사스러운 요술이나 마술이니 이런 게 아니고, 간사스러운 자가 충직한 체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갓 든 것 없는 시골 향원 주제에 덕행이 있는 체, 괜히 겸손한 체하는 것이라고 했다. 바로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여즉 큰 아픔도, 슬픔도, 절망도, 굶주림도, 뼈저린 실연도, 어디 내놓을 만한 얘깃거리 하나 없고, 그저? 그렇다. 쏟아지는 서글픔과 처량함 속에 실컷 그슬려나 보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