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케언즈에서 8개월 가량 머문 적이 있다. 인구 10만의 작은 휴양도시지만 이곳 사람들의 생활 습관은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느릿한 듯 급하고, 이기적인 듯 이타적인 구석이 있어 은근히 사람을 잡아끌곤 했던 기억이다.

이들의 관심사는 테니스와 골프 그리고 크리켓이다. 그랜드슬램의 첫 관문인 호주오픈을 자랑스러워하고, 시골 작은 학교에서조차 특별활동으로 골프를 가르치는, 영국 식민지였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영국 국기인 크리켓을 온 국민이 즐기는 곳, 그런 그네들의 또 다른 취미가 바로 경마다.
인적 드문 곳에서조차 군데군데 TAB(Totalistor Agency Board)이라는 간판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는 간이 마권 발매처를 말한다.

멜번컵의 위대한 역사나 성대한 규모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그들의 경마축제지만 애버리진(호주 원주민)이 반 수 이상을 차지하는 북부 시골에서조차 경마가 생활화되고 마권구매가 일상의 소비가 됐다는 점은 지금 생각해봐도 이채롭다.

시골 노인네가 일주일에 1불·2불 털어 마권을 사고 복권을 산다해서 “그런 사행심이야말로 망국병”이라고 호통칠 수 있겠는가.

로또 복권을 보자. 800만 분의 1의 확률을 믿고 수십억 한탕을 노리며 이유 없이 숫자 찍기를 하는 복불복(福不福) 놀음에 지난해만도 3조 8천억 원이 모였다고 한다. 우리 국민의 크고 작은 사행심이 모인 결과다.

또 얼마 전엔 직장인의 60% 이상이 로또 당첨을 희망한다는 한 리서치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사행심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최근 미국에선 6만 배 짜리 배당이 픽4(pick-4, 지정된 4개 경주의 우승마 알아맞히기) 승식에서 터져 화제가 됐다. 29만 달러 어치 팔린 마권 중 적중마권은 4달러였고 이중 최고 당첨 금액은 2달러다. 행운의 주인공은 단 돈 2300원 투자해 1억5천만 원의 횡재를 했다.

우리처럼 제한된 승식과 제한된 인원으론 절대 이런 배당이 나올 수 없다. 구조적으로 대박이 발생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올해 초 제주경마장에서 발생한 6만5천 배도 적중자가 단 1백 원만을 구매했기 때문에 가능한 배당이었을 뿐, 만일 그가 1000원 어치 샀다면 6천5백 배, 10000원 어치 샀다면 6백50배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승식의 개발 및 도입 그리고 저변인구 확대는 한국 경마가 실현해야 할 시급한 과제다.

우리는 2300원으로 1억5천만 원을 만든 사람을 보며, 때론 50억 짜리 로또 복권에 당첨된 사람을 보며 부러움을 느낀다. 사행심은 나쁜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1천 원 2천 원으로 1천 배, 2천 배를 꿈꾸는 이들에게 도박 중독이라 할 것인가. 매주 1만 원 어치 로또를 사는 사람에게 복권에 미쳤다고 비난할 것인가. 그것은 반복되는 일상의 반복되는 활력소고 일주일 후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그들 나름의 희망이다.

그런 그들에게 왜 요행을 바라느냐고, 사행심은 마음의 병이라고 탓할 수만은 없다.

경마도 마찬가지다. 1.1배 짜리 연승식, 2.0배 짜리 복승식 마권에 수 천만 원을 털어 넣고 마음 졸이는 고액베팅이 문제지, 딸의 생일이라며 그 숫자대로 마권을 사거나 좋아하는 말이 나왔다고 그 말에 돈을 거는 일 따위를 두고 터무니없다며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경마의 생활화, 이는 우리 정서 상 접근이 참 난감한 주제다. 섣불리 꺼냈다간 “미친 것”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딱이다. 가뜩이나 살기 어렵다는데 중독자처럼 도박을 일상에 끌어들이자는 것이냐고 욕부터 날아올지 모르겠다.

그런데 실상 경마의 가장 큰 문제는 중독과 집착이지 사행심 자체인 것은 아니다. 대박을 바라며 경마장에 오는 것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반복적으로 모든 것을 걸려는 한탕주의가 위험하다는 뜻이다.
경마에서의 999는 저배당에 몰빵하는 부정적 속성을 솎아내는 대신 대중 속으로 들어가는 비상구가 될 것이라는 아이러니한 생각을 해본다.

【편집국 차장 eheek@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