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 이희영 조교사
지나간 기다림은 결코 길지 않았다 …13년만에 거둔 결실 ‘그로브레이디’
일간스포츠 경마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시상대에 선 이희영 조교사는 시종일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뉘라서 큰대회에서 우승한 것이 기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조교사는 기쁨을 마음속으로 깊이 갈무리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87년 12월, 뚝섬에 몰아치는 겨울바람에도 이희영 조교사는 결코 추운 줄을 몰랐다. 조교사가 되고 난 후 불과 1년만에 그랑프리 우승이라는 초유의 성적을 거둔 것. 아직도 이 조교사 가슴속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는 ‘청하’가 바로 그에게 그랑프리를 안겨준 것.
그후로 1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명마를 기다리는 것은 모든 조교사들의 소망이겠지만 짧은 시간에 그랑프리를 차지했던 그에게 명마를 기다리는 기다림은 더욱 컸을 것이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듯, 해가 거듭될수록 기다림은 계속되었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
경마대회에 경주마를 내보내는 모든 조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우승을 하고 싶은 것은 당연지사였지만 경마대회 출전등록을 할 때에서야 ‘그로브레이디’의 김진태 마주에게 경마대회 출전을 알릴 정도였고, 마주에게 그저 마음 편하게 관전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심전심이라 했던가. 김마주는 경마대회 당일 마주실에 있으면서도 조교사나 기수에게 부담이 될까봐 경주직전까지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조교사는 기수 출신이다.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작은 아버님 친구분의 권유로 경마장에 첫 발을 디디게 되었다. 기수양성소 4기 출신으로 10년여의 기수생활을 한 그는 86년 과감히 기수로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조교사로 거듭나게 된다. 체력적으로나 나이상으로 충분히 기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기수생활동안 수시로 그를 괴롭히던 부상에서 벗어나고자 조교사로의 전환을 택하게 된 것이다. 물론 조교사가 되기까지 행운이 따라 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신임조교사에게는 보유두수 제한이 있다. 당시 14두를 배정받았는데, 타조에서 받은 마필을 가지고 좋은 성적을 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년퇴임을 한 권인철 조교사(13조)가 관리하던 마필중 ‘청하’를 받은 것은 최대의 행운.
‘청하’와 ‘그로브레이디’는 이 조교사에게 경마대회 우승을 안겨준 마필이라는 공통점 이외에도 유사한 점이 많았다. ‘청하’가 그랑프리 출전신청을 했지만 순위에 밀려 대기 1순위, 출전의 희망이 없다고 느꼈으나 출전을 앞두고 있던 마필중 1두가 취소되는 바람에 후보로 출전기회를 잡게 됐다. ‘청하’는 그당시 1등급 마필들과 겨뤄본 적이 없어 큰 기대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출발과 동시에 선행에 나서는 순간 이 조교사는 우승도 가능하겠다는 기대를 했다고 한다. ‘청하’는 당시까지 선행에 나서 단한번의 패배도 하지 않은 말이었기에.... “당시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승리의 화신이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는 그의 말처럼 최근 13조는 가장 좋은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13조의 상호는 ‘애마’. 상호처럼 13조는 단합에 있어서 타마방을 압도한다. 제일 먼저 말사랑을 강조하는 이 조교사의 당부에 마방식구들은 서로가 모든 일에서 자신의 일처럼 온 몸을 아끼지 않고 있다. 바로 이것이 13조 상승세의 원동력이다.
13조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오명섭 기수와 ‘풀그림’일 것이다.
이 조교사는 오명섭 기수가 경마장을 떠나있게 된 때, 제주도 목장을 소개했다. 결국 기수로 돌아올 거라면 목장에서 일을 하면서 기승감각을 유지하고, 말에 대해 직접 몸으로 체험하라는 의미에서다. 물론 지난 1년간 그는 오기수를 보기 위해 제주도를 무던히도 많이 찾았다. 그만큼 오기수를 아꼈다는 얘기다. 그가 말하는 오명섭 기수는 말을 타는데 있어 욕심이 많고 승부근성이 강한 기수라고 평가한다. 또한 강한 승부근성뿐 아니라 성실함과 차분한 면도 갖추었다고 한다.
기승자세에 있어 다소 높은 감이 있어 자세를 더욱 낮추라고 주문하고 있지만 오기수 만의 스타일이 있고, 원체 중심점이 잘 잡혀 있다고 한다. 물론 선배들을 뛰어넘기 위해선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항상 강조한다.
주머니에 넣은 송곳처럼 이 조교사의 마음 한구석을 그늘지게 했던 것이 바로 불운의 명마‘풀그림’이다. 최고의 자리를 눈앞에 두고 갑작스런 추락을 해버린 ‘풀그림’이 13조로 옮겨온 뒤 2년3개월을 거쳤다. 그동안 많은 실망과 안타까움을 안겨주었지만 최근 나아진 모습을 보며 다시금 기대를 걸고 있다. 이 조교사는 ‘풀그림’이 경주에 출전해 최선을 다해주고, 건강하게 경주를 완주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13조라 13년만에 경마대회 우승을 한거야” 웃음을 지으며 소탈하게 얘기하는 그의 모습에선 그가 기다린 13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고, 이번 우승을 계기로 더 좋은 말을 배출할 거라는 그의 소망대로 경마사에 길이 남을 수 있는 명마가 탄생할 날을 기대해 본다. 【권순옥 차장대우 margo@krj.co.kr】
SPONSOR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