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김명국, 박태종으로 이어지는 리딩자키 계보의 원조격인 백원기 전 기수. 뚝섬시절의 향수에 빠져있는 팬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당시 최다승 기록이었던 624승을 뒤로한 채 씁쓸하게 경주로에서 물러나야 했던 그가 세상의 풍파를 헤치고 16년만에 경마전문가로 경마장에 돌아왔다.
-경주로 주름잡던 ‘뚝섬의 황태자’
화장실에서 신문을 뒤적이다 기수시험 공고를 보고 기수가 되겠다고 생각 했다는 백원기. 우연한 시작이었지만 작은 체구에, 어려서 기계체조를 했고 핸드볼은 도대표를 했을 정도로 운동에는 남다른 소질이 있어 기수로서의 성공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73년 3월 31일 기수양성소 2기로 기수면허를 취득한 그가 데뷔할 당시만 해도, 김재복(현 조교사), 이인성(전 조교사) 등 쟁쟁한 스타 기수들의 그늘에 가려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그가 두각을 나타낼 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77년 춘계 경마대회. 2400m 경주에 처녀 출전하는 비인기마 ‘카사델라’에 기승한 백원기 기수. 당시 기승경력 4년의 신인 기수였던 그는 선행 습성의 말을 타고 치밀한 추입 작전을 펴며 쟁쟁한 강자들을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천재성을 유감 없이 발휘한 그는 이후 ‘자격루’,‘천둥’,‘포경선’등과 호흡을 맞추며, 뚝섬벌을 호령하는 리딩자키로 군림한다.
-“말을 잊겠다”
‘뚝섬의 황태자’로 군림하며 최다승 행진을 계속하던 85년 6월. 그에게 뜻하지 않는 사건이 발생한다. 친구와 장난으로 구매한 마권 한 장으로 그의 인생이 바뀐다. 당시는 배당에 대한 협박편지가 접수돼 경마장 경비가 칼날같이 매서웠던 때. 결국 그는 경마부정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화려한 전적을 뒤로한 채 불명예 은퇴를 하게 된다. 12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수 생활 동안 올린 승수가 무려 624승. 당시에도 그리고 김명국(현 조교사) 기수의 722승이 나오기 전까지도 최다승 기록이었다. 정상적으로 기수 생활을 마쳤다면 1000승도 자신했고, 조교사 면허를 두 번이나 취득하고도 오로지 말을 계속 타고 싶다는 생각으로 후배들에게 양보했던 그였기에 불명예 은퇴는 더욱 가슴아픈 일이었다. 3개월간 두문불출하고 아쉬움을 삭이던 86년, 그가 택한 길이 그리스행. 그리스에서는 따로 기수 면허 없이 한국에서의 기수 성적만으로도 기수 생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최고의 기수로 이름을 날리던 그였지만 그리스에서의 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그리스경마는 우리경마와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전 세계를 순회하며 이름을 날리는 외국의 유명 기수들 사이에서 기승 기회를 잡고 좋은 성적을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자녀의 교육문제로 고민하던 88년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혹독한 그리스에서의 기수생활도 힘들었지만, 기수 시절 그리고 방황 끝에 내린 그리스행이라는 결정에도 묵묵히 따라줬던 부인의 강력한 권고는 귀국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귀국하는 순간, 이제는 말을 잊겠다는 생각으로 모든 기억을 지우고, 갖고 있던 사진도 모두 찢어버렸다. 경마전문가로의 복귀를 결정하고 경마공부를 하기 위해 자료를 찾았을 때, 부인이 스크랩 해 놓은 신문 기사와 사진 몇장이 전부였을 정도로 그 때 당시 말을 잊으려는 그의 노력은 대단했다.
-경마꾼이 아닌 경마팬을 위한 전문가
말을 잊고 성공하겠다는 각오로 시작한 사업. 건축일을 하고 일식집, 우유대리점을 하며 점차 사업가로 자리잡아 가던 그에게 IMF라는 예기치 못한 복병이 등장한다. 이제는 두려울 게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그였지만, 나라도 망하게 한 IMF를 이길 수 있는 뾰족한 묘수가 그에게는 없었다. 결국 사업을 정리한 98년부터 경마전문가로의 복귀를 준비했고 불명예 은퇴로 짊어져야 했던 경마관여금지라는 멍에를 작년에 벗어 던지고, 올해 드디어 경마전문가로 복귀했다.
데뷔한지 한 달 남짓한 신인이지만, 화려한 기수 생활은 그에게 큰 재산이다. 경마라는 것이 워낙 복잡해 예상에 관한 한 많은 변수가 있는 것이 사실이나, 말을 보는 눈은 직접 말을 타보지 않고는 모른다며, 누구보다 말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그가 말하는 기수 출신의 장점이다. 조교사나 기수의 실수를 날카롭게 지적해내는 것은 경마전문가로서의 당연한 책무지만, 전문가로서 그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조교사나 기수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예상을 하는 것. 현역 조교사나 기수가 그와 친분이 두터운 선·후배이기도 하지만, 그가 기수 출신이라서 누구보다 그들의 애환을 잘 알기 때문이다.
국내외에서 화려한 기수 생활을 하고 돌아온 백원기. 후배 기수를 바라보는 눈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후배 기수들에게 해외경마를 많이 체험하고 외국의 선진 기승술을 배워 전반적인 기승술은 좋아 졌지만, 경주마 수준이나 경주로 조건 등 우리경마의 여건을 고려하여 선진 기승술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노력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에게 기수 시절 경주로에서 봤던, 그리고 16년만에 돌아와 관람대에서 지켜 본 우리경마의 현실은 엄청난 차이로 다가온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수들에 대한 복지도 향상됐고, 전반적인 관중들의 수준도 향상됐다며 경마꾼이 아닌 진정한 경마팬이 늘어나기를 바란다고 한다. 경마전문가로 복귀한 이유도 경마꾼이 아닌 경마팬들에게 말에 대한 기초 상식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아직도 기수라고 불러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는 백원기. 행복이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때때로 힘들어하는 동료, 후배 기수들의 모습은 행복에 겨운 투정이라고. 뜻하지 않은 일로 기수 생활을 접고, IMF의 터널을 힘겹게 지나 다시 경마장에 선 백원기. 비록 원하던대로 경주로에서 말을 타지는 못하지만 관람대에서 힘차게 질주하는 경주마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서 ‘행복’이라는 두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권현 기자 knhn@krj.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