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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서글한 눈매에 다소 톤이 낮은 어투로 부담감 없는 사람, 김귀배 기수. 너무나 선해 보이는 그는 기수경력 23년의 왕고참 기수다.
경마의 꽃이라는 기수, 서울경마공원에서 활동하는 72명의 기수를 모두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특히 장기간에 걸쳐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하는 기수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서울경마공원 시대가 열린 후 부진했던 김기수가 최근 장안에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비록 타조 마필이지만 ‘론이글’과 ‘돈방석’으로 우승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경마팬의 탄성이 이어졌다. 재기를 의심케하는 장기간의 부진 속에서 일궈낸 인간승리에 경마팬의 아낌없는 박수가 저절로 나온 것이다.
기수로서는 황혼이랄 수 있는 나이 40에 새롭게 시작하는 기수로서의 삶, 김기수는 자신이 일생을 맡긴 경마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다.
이웃아저씨 같은 그의 이면엔 척박한 땅에 새싹을 틔워낸 농부처럼 가득 담겨진 진솔한 관록을 엿볼 수 있다.
노장투혼을 발휘하고 있는 김귀배 기수를 만나 경마와 함께 살아온 얘기를 들어보았다.
- ‘포경선’과 ‘연안부두’
김귀배 기수의 경마인생은 79년 당시 조교사로 재임중이던 이한수 조교사의 소개로 기수양성소에 입소하면서 시작됐다. 정규 5기로 기수양성소에 입소, 79년 4월 11일 기수로 데뷔했다.
당시 경마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은 누구나 겪었을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에게 최고의 절정기가 찾아온 것은 86년.
당시 스포츠서울배 경마대회와 일간스포츠배 경마대회에 ‘만세호’와 호흡을 맞추며 출전, 선전을 했으나 쉽게 우승운이 따르지 않았다. 결국 3위만 2번......
그런 그에게 그랑프리 출전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85년 그랑프리 우승마인 ‘포경선’에 기승하게 된 것이다.
그가 기억하는 ‘포경선’은 한마디로 괴물이다. 평생 그랑프리를 잊지 못하는 만든 마필이다. 우승을 차지했다는 것도 있지만 또다른 이유는 당대의 명마 ‘포경선’이 어렵게 받은 그랑프리 우승컵을 깨뜨리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65kg이라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부담중량을 짊어지고 1850m를 2분 01초로 우승한 ‘포경선’이 경주가 끝난 후에도 펄펄 나는 힘을 자랑하다 결국 그가 받은 우승컵을 상하게 한 것이다.
잊을 수 없는 마필이 또 있다. 바로 ‘연안부두’로 그에게 추입마를 좋아하게끔 만든 마필이다. ‘연안부두’는 조금은 얇아 보이는(체구가 날씬한?) 수말로 전형적인 추입마였다.
‘연안부두’에 처음 기승하던 때, 선배인 김영주 기수에게서 기승노하우를 전수 받았다. 바로 4코너에서 왼쪽 채찍질을 하라는 것이었다. 뚝섬은 현재의 과천경마공원과는 달리 경주 방향이 시계방향이었다. 때문에 경주마에 기승할 때 대부분 오른쪽 채찍질을 하는데, 이 말은 특이하게도 오른쪽을 때리면 특유의 추입력을 살리지 못하는 습성이 있었던 것이다.
초반부터 꾹 참고 가다가 4코너에서 왼쪽 채찍을 대자마자 쏜살같이 앞으로 치닫는 ‘연안부두’는 그야말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느낌을 주었다. 그 느낌은 10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남아서 추입마에 대한 그리움을 갖게 한다고 말한다.
- 조교사 전업까지 “많이 타고 잘 들어오는 것”이 목표
김기수는 2남3녀를 둔 가장이다. 최근 들어 몇 번의 입상을 기록했지만 수년간 지속된 부진은 현대에 걸맞지 않게 많은 자녀를 둔 그에게 기수생활 포기를 심각하게 고려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렵게 보내온 시절이지만 기수에 대한 미련이 그를 붙잡았고, 지금의 최고참 자리에 서게 만든 것이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과천경마가 시작되던 때였고 회상한다. 가뜩이나 슬럼프를 보이던 그의 성적에 정반대로 진행되는 경주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곤두박질 치게 된 것이다.
‘론이글’로 간만에 우승을 차지했을 때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매경주 우승에 대한 꿈을 가지고 출전해야 하지만 기승기회가 적고, 인기마를 타는 기회가 거의 없던 그였기에 감개무량함을 표현하기 힘들었다. 98년 4월‘디어래시’로 우승을 차지한 이후 3년만의 우승이었다. 곧바로 또다시 ‘돈방석’으로 우승을 차지하면서 그의 입가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남들은 하루 많게는 5승도 한다지만 3년만에 거둔 2승의 무게는 수 십 번의 우승 못지 않은 큰 수확이었던 것이다.
뚝섬시절부터 함께 생활을 하던 중고참 기수들은 김기수에 대해 ‘마라토너 이봉주와 같은 사람’이라고 평을 한다. 언제나 과묵하고, 항상 웃는 낯으로 후배를 대하는 등 너무나 좋은 사람이지만 결정적일 때는 과감한 결단을 내릴 줄 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외유내강(內柔外剛)의 소유자란다. 비록 기승기회가 없어 성적은 저조하지만 틀림없이 파이팅을 보여줄 수 있는 고참인 것이다.
김기수는 2,3년 후에는 조교사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물론 생각처럼 쉽게 이루어지진 않겠지만 그동안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가슴속에는 경마장에서 평생을 보내기로 굳은 결심을 한 까닭이다.
휴일이면 등산을 통해 체력을 단련한다. 격한 운동을 하기엔 몸에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근지구력을 기르고, 마음을 단련할 수 있는 등산을 즐기는 것이다.
어린 후배들이 보기엔 많은 나이지만 아직 김 기수는 경주를 하는데 큰 무리는 없다고 밝히며, 예시장에서 자신을 향해 파이팅을 외치는 경마팬을 보면서 내심 다짐을 했단다. ‘올해는 많이 타고 잘 들어오겠다’고....
마필 훈련에 전력을 다하고 자신이 기승해 성적을 올린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후배기수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김귀배 기수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외딴 섬에서 묵묵히 제 할 일에 충실한 이름모를 등대지기처럼 마음 속을 따뜻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사람인 것이다.
척박한 한국경마 어제를 걸어오고, 끝없이 뻗어나가는 내일을 밝혀주는 훌륭한 등대지기일 것이다.
【권순옥 기자 margo@krj.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