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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수협, 감사패 전달로 아쉬움 달래
이형기 시인은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아는 이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했다.
이기적이고 바쁜 현대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이 바로 떠나야 할 때다.
얼마전 있은 한국마사회 조직개편 때, 정년을 1년 앞둔 최충식 발주처장은 23년여의 경마인생을 접고 명예퇴직을 자청, 후배의 길을 터주며 미담을 남겼다.
자연인으로 돌아가 영원한 경마인임을 되새기고 있는 최충식씨를 만났다.
<아∼발주대!, 18년을 함께 한 마음의 고향>
출발을 알리는 팡파르와 함께 경주로 한복판에서 유연하게 깃발 흔들던 사람을 기억하는가?
바쁘게 돌아가며 변화하는 일상 속에서도 변함이 없는 것이 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주 열리는 경마가 그러하고, 또 매 경주마다 떨리는 마음으로 출발 신호를 알리던 최충식 발주처장이 그러했다.
지난달 명예퇴직을 하기 전까지, 그는 무려 강산이 바뀌고도 남을 18년 간이나 한 자리를 고집해왔다.
야구 선수를 꿈꾸던 그가 경마계로 발을 들여 놓은 지 벌써 23년이다. 마음은 늘 처음 같은데 세월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며 웃는 최처장의 모습이 어쩐지 허전해 보인다.
섭섭한 걸까?
“시원섭섭”이라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최처장은 이제야 찾은 주말이 반가와 시원하고, 숨쉬는 것만큼이나 익숙했던 일에서 손을 떼니 섭섭하다고 전했다.
황해도 해주가 그의 고향이라면 발주대는 어느새 찾아 온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만큼 많은 애정이 담긴 곳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가슴 졸이며 긴박한 승부의 시작을 알리기도 했고, 동료들의 부상과 아픔을 지켜봐야 했으며, 어디로 튈지 모를 경주마의 악벽으로 팬들의 질타를 받기도 했던 곳이 바로 그의 고향인 것이다.
<자신의 일에 충실하라>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서 언제나 원칙을 고수하고, 무엇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긍지를 가질 것’
최처장이 후배 경마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원리원칙만을 고수했던 그는 “한 마디로 까다로운 성격이죠. 주위 사람들이 힘들었을 겁니다”라며 허허 웃고 만다.
발주 업무는 마필관리자와 긴밀한 관계를 요한다. 그러다 보니 서로간 상충하는 부분도 자주 발생하고 빈번한 발주재검 요청에 대해 조교사나 마필관계들은 잦은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어떤 말은 어떤 특징이 있고 또 어떤 악벽이 있으며, 출발 시에나 발주기 내에서 어떤 습성이 있는 지 때로는 관리자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발주 위원이다.
그래서 친분이 두터운 조교사나 기수라 할지라도 공정한 경마시행을 위해 발주 재검이나 발주 제외 등을 결정하기도 한다. 발주기 진입부터 출발 신호까지 허락되는 시간은 고작 5분. 이 순간에 내려지는 최처장의 판단에 경마팬과 그 관계자들은 울고 웃는다.
“요즘은 팬들이 더 정확해요. 제2의 심판위원이라 할 수 있는 거죠. 수년간 이곳을 지키면서 잘못된 판단이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엔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이죠”
매사 적극적이었던 그는 뒤로 빼고 물러서는 일에는 익숙지 않다.
그래서였을까? 지난해 말부터 불거져 나왔던 구조조정이라는 소리에 당장 자신의 일부터 떠올렸나보다.
“이제 정년이 1년 밖에 안 남은 접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 이해영 과장이나 이방덕 대리는 창창한 세월이 남았죠. 제가 나가야 길을 터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발주위원들의 골칫거리, ‘이화령’>
매 경마일마다 숱한 말들이 출발 신호를 기다리며 발주기 앞에 서 있다.
온순하게 자신의 길만 바라보며 작전을 구상(?)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주위가 산만해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성가신 말도 있게 마련이다.
그가 기억하는 최악의 경주마는 바로 ‘이화령’이다.
“‘이화령’ 그 녀석이 출전할 때마다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몰라요. 결국에는 사고도 한번 쳤죠. 어휴∼ 그때 진땀 뺐던 거 생각 하면…(웃음)”
지난 98년이었던가… 발버둥 치던 ‘이화령’을 간신히 발주기 내로 밀어 넣고 황급히 출발 신호를 울렸던 최처장. 하지만 미처 발주기 뒷문이 닫히지 못했던 상황이었고 ‘이화령’은 출발 신호에 아랑곳없이 발주기 뒷문으로 쑥 빠져 버렸다.
결과는 15분 후 재발주. 물론 이미 발매된 마권은 환불 조치 됐으며 많은 팬들과 관계자의 원성이 빗발쳤다.
발주위원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던 순간이다.
또 얼마 전에는 신마 ‘장수’로 또 한번 애를 먹었다는 최처장.
평소에는 그리 심하지 않았던 ‘장수’의 발주기 진입 거부 악벽이 이날 따라 유난히 심해 경주가 지연되던 상황이었다. 초조하게 발주위원들의 진입 시도를 지켜보며 시계를 들여다 보던 최처장은 딱 5분만 기다리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계 바늘이 5분이 되던 무렵 가까스로 ‘장수’는 출발 선상에 섰고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출발 신호를 내렸다.
그런데 힘을 너무 많이 뺀걸까? 이 경주에서 인기마였던 ‘장수’는 어이없게 3위로 결승선을 통과했고 그 마권을 구입한 팬들은 진작 발주 제외시켰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게 아니냐며 빗발치는 항의를 해왔다.
“말들은 참 예민해요. 또 어떤 행동을 보일지 예측할 수 없죠. 그래서 이 일이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출발 신호와 함께 일제히 결승선을 향해 질주하는 말과 기수를 보면 더 없이 흐뭇해진다는 최처장. 이것이 바로 18년 간이나 그를 이곳에 묶어 두었던 이유다.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은퇴한 지금, 최처장이 가장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부상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 해준 발주위원들과 후배들에 대해 충분히 배려해 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던 건 이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죠”
(기자와 인터뷰하는 동안 그는 몇 번이고 이들의 어려움과 희생에 감사한다는 뜻을 표했다.)
그와 십수년간 함께 일해 온 이방덕 대리의 말을 들어 보자.
“굉장히 자상한, 큰 형님 같은 분이셨죠. 항상 아랫사람들 먼저 살피고, 또 솔선 수범할 줄 아는 분이셨어요. 물론 실수라도 하면 큰 소리로 야단도 많이 치셨지만요(웃음)”
퇴직하던 날 이례적으로 기수협회가 그에게 감사패를 수여한 것도 다 이런 점 때문이었을 거다. 서운했던 마음이 감사의 마음으로 달래졌다며 그 역시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며 공정 경마 시행을 위해 앞장섰던 최충식 발주처장은 영원한 경마인의 이름으로 남을 것이다.
【이희경 기자 pinklady@krj.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