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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세계’와 만났던 시기는 녀석이 이미 현역에서 거의 은퇴했던 시절이었다. 녀석은 아주 부드러운 피부를 지녔고 털을 쓰다듬으면 다른 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손으로 목을 쓰다듬다가 그 부드러운 느낌에 반해서 언제나 뺨을 녀석의 목덜미에 대보곤 했던 기억이 난다. ‘월세계’와 함께 대회에 참가한 기억은 거의 없지만 내 기억 속에는 언제나 미안한 마음이 든다. 녀석을 생각하면 불쌍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은 마음만 있다.
인기 말의 고충(?)
대부분의 말들이 그렇듯 녀석 역시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 초보 승마인을 태우는 강습용 말로 전업을 하게 됐다. 현역으로 뛰던 당시 보여줬던 화려함은 없었지만 ‘썩어도 준치’란 말처럼 다른 강습용 말들과는 우아함과 세련됨에서 상당한 차이가 느껴졌다. 녀석에게 초보자가 기승하더라도 그 기승자를 돋보이게 해주는 능력을 갖고 있었고, 그게 녀석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게다가 오래된 연륜과 나이 때문인지 아주 온순했다. 기승자의 어설픈 부조에도 항상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초보 승마인들 사이에서는 꽤 인기가 많았다. 인기가 많은 말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인기만큼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기도 하지만 그만큼 고생도 많이 하기 때문이다. 말을 타는 어느 사림이든지 좋은 말은 쉽게 알아볼 수 있고, 또 그런 말을 타고 싶어 한다. 그런 이유로 인기 있는 말들은 인기에 비례해 상당한 고충을 갖고 있다. 다행히 얌전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기승자를 만나면 운동을 조심스럽게 시키기 때문에 견딜만하지만, 거친 성격을 소유한 기승자를 만나면 온몸이 땀범벅 돼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방 안으로 들어오기 십상이다. 거친 기승자를 만났을 때마다 ‘월세계’의 눈은 “이제 좀 그만하자!”란 말을 하고 싶어 하는듯해 마음이 너무나 아팠던 기억이 난다.
의문의 ‘물풍선’
그날도 단체 강습을 마치는 마지막 날이었다. 강습생이 제법 많았지만 그날은 공교롭게도 평소 겁이 많고 얌전한 한 여성 강습생만 혼자 출석했다. 그 강습생은 ‘월세계’ 녀석을 타고 싶어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녀석을 배정해 주기를 정중하게 부탁했다. 우리는 흔쾌히 녀석을 그 강습생에게 배정했다. 그때가 아마 11월 초순쯤으로 기억된다. 말이 살찌는 천고마비의 계절의 막바지여서인지 ‘월세계’ 녀석의 몸은 나이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불어 있었다. 강습을 마친 후 녀석을 타고 있는 강습생의 사진을 찍어주려고 카메라를 들고 녀석의 옆쪽으로 갔다. 사진을 막 찍으려고 하는 순간 녀석이 소변을 보려는 자세를 취했다. 난 그런 녀석의 행동에 방해가 될까 봐 소변을 다 볼 때까지 조심스럽게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소변을 보던 녀석의 회음부에서 물풍선 같은 게 튀어나왔다. 난 깜짝 놀라서 기승자를 내리게 하고 녀석을 움직이지 못하게 잡고 있으라고 하고 마방으로 가서 관리사 아저씨에게 내가 본 상황을 말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밖으로 나가 녀석이 서 있는 모습을 확인한 관리사 아저씨는 처음 보는 일이라며 나와 있는 물풍선을 잡아 빼내려고 했다. 그러자 녀석은 고통스러워했다.
임신한 ‘월세계’
다시 마방으로 뛰어들어가서 다른 아저씨를 데리고 왔다. 당시에 우리 마장에는 한국마사회의 경주용 휴양 마필이 20여 두가 와있었으며 휴양 마필과 함께 관리사 아저씨들도 함께 와있었다. 녀석의 모습을 보고 한국마사회에서 파견 나온 아저씨는 다짜고짜 메인 안장을 풀어헤치며 “빨리 얘 마방에다가 깨끗한 볏짚을 듬뿍 깔아줘”라고 말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나와 관리사 아저씨는 땀을 뻘뻘 흘리며 깨끗한 볏짚을 한가득 갈아놓았다. 잠시 후 한국마사회 마필관리사 아저씨는 녀석을 조심스럽게 끌고 와서 마방 안에 넣고 모두 자리를 피하라고 했다. 그 마필관리사 아저씨는 “아이고 불쌍해라 임신을 했었나 보네, 어찌 몰랐을까” 하시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임신의 전말
당시 우리 마장에는 여러 마리의 수말이 있었지만 마방은 따로 격리돼 있었기 때문에 사고(?)가 발생할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월세계’ 녀석이 임신을 하다니.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마방 밖 한편에 조랑말과 서러브레드 사이에서 태어난 반종(지금의 한라마) 수놈 한 마리가 상주하고 있었는데 그놈의 짓이었다. 그 상서롭지 않은 일이 일어난 후에 우리는 관리사 아저씨로부터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어느 날 저녁 당직을 하던 중에 그 나쁜 놈(?)이 서너 번 자기 마방에서 탈출했었고 그때마다 ‘월세계’의 마방 앞에서 붙잡히곤 했다고 했다. 아저씨도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다고 했다. 왜냐하면 ‘월세계’ 녀석과 그 나쁜 놈의 크기와 신장 차이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아무 일이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크기 차이가 컸었는데. 여하튼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녀석의 배는 불어났던 거고, 그런 일이 있었으리란 상상도 못 한 우리는 계속해 녀석을 강습에 투입했던 거다. 녀석은 우리를 얼마나 잔인하게 생각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일이다. 임신했다는 짐작만이라도 했었더라면 그런 처참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비참한 조산의 결과
자리를 피해 주고 서너 시간 남짓 지난 후 불안한 마음을 갖고 녀석의 마방으로 향했다. 마방광경을 확인한 우리는 붉어진 눈에서 눈물을 감추려고 연신 마방 천장만 바라보며 한숨만 쉬었다. ‘월세계’ 녀석은 털이 채 나지도 않은 쌍둥이 망아지를 조산했다. 한 마리는 이미 사산된 상태로 나왔고, 다른 한 마리는 숨은 붙어있었지만 조산이라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었다. 그 망아지도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세상의 끈을 놓고 말았다. 우리는 양지바른 곳에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불쌍한 두 녀석을 정성을 다해 묻어줬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몇 날 며칠 동안은 우리 모두 우울하게 지냈다. 사랑스러운 새끼들을 보낸 녀석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새끼를 낳은 자리만 몇 날 며칠을 바라보며 새끼를 찾는 듯한 녀석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심장이 떨리고 몸에 열이 나는 것 같다. ‘월세계’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인기가 많은 말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인기만큼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기도 하지만 그만큼 고생도 많이 하기 때문이다. 1985년, 기억이 나지 않는 말과 함께 뚝섬승마장에서.
▲‘월세계’의 몸집이 불어있던 것은 말이 살찌는 천고마비의 계절 때문이 아니라 녀석의 아무도 몰래 했던 임신 때문이었다. 지금도 ‘월세계’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2002년 호주 전지훈련 당시 모습.
교정교열= 황인성 기자
